박해성(52회)지리산고등학교 교장-부산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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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성(52회)지리산고등학교 교장-부산일보

3,570 관리자 2012.06.12 12:25

사회


[人+間 (인+간)] 참인간 육성 지리산고 교장 박해성

장학금 베풀면서 가족 굶긴 교장 아버지 당신 닮아 산골에서 '가난한 꿈' 키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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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間 (인+간)] 참인간 육성 지리산고 교장 박해성
자연과 더불어 생활하고 배우는 경남 산청군 단성면 지리산고 학생들. 웃는 얼굴이 해맑다. 학생들은 어떤 이를 만나도 배꼽인사를 한다. 박해성 교장이 강조하는 인성교육이 이 학교 최우선 교육 방침이기 때문이다. 교정에 우뚝 선 아름드리 느티나무처럼 학생들은 장차 이 나라의 버팀목이 되고자 한다. 김병집 기자 bj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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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間 (인+간)] 참인간 육성 지리산고 교장 박해성
자연과 더불어 생활하고 배우는 경남 산청군 단성면 지리산고 학생들. 웃는 얼굴이 해맑다. 학생들은 어떤 이를 만나도 배꼽인사를 한다. 박해성 교장이 강조하는 인성교육이 이 학교 최우선 교육 방침이기 때문이다. 교정에 우뚝 선 아름드리 느티나무처럼 학생들은 장차 이 나라의 버팀목이 되고자 한다. 김병집 기자 bjk@







 
인 성 교 육

스물여덟의 청년 교사 박해성은 경남 창원 대산중학교로 부임했다. 첫해 중1 담임을 맡았는데 한 학생이 가출을 했다. 가정환경이 좋지 않은 데다 같은 학교 3학년인 누나가 꼬드겨서 함께 도망을 갔다. 수소문을 해서 부산에 있는 중국집에서 배달일을 하고 있던 학생을 찾아 데려왔다. 학생의 아버지가 아이를 잘 부탁한다고 신신당부했다. 그런데 부임 1년 만에 개인 사정으로 부산으로 전근을 갔다. 소식을 들으니 그 학생은 결국 학교를 그만두었다고 했다. 아이를 끝까지 책임지지 못한 죄책감이 남아 있다. 학생은 교사를 닮는다. 그래서 그는 좋은 교사가 되기로 다짐했다.


■ 명색이 교장 아들인데

교사라는 직업은 예나 지금이나 선망의 대상이다. 그런데 경남 산청군 단성면 지리산고등학교 박해성(57) 교장은 어린 시절 초등학교 교장인 아버지가 있었지만 가난을 피할 수 없었다. 당시 학교장의 월급이면 넉넉지는 않지만 시골 여타의 다른 직업에 비하면 괜찮았다. 하지만 아버지 박상화(88) 교장은 월급을 제대로 집에 가져오지 않았다. 어린 해성은 자기가 왜 가난한지 알 수 없었다.

해성은 경남 산청군 삼장면 삼장초등학교 사택에서 태어났다. 위로는 누나 두 명이 있었고, 아래로 남동생이 태어났다.

아버지가 월급을 제대로 가져다주지 않자 어머니 조종주(2001년 별세) 여사는 2녀 2남을 키우기 위해 돈을 벌어야 했다. 시골에서는 각종 계가 성행을 했다. 민간이 운영하는 요즘의 적금 같은 것인데 계주는 신망이 있는 사람이 된다. 교장 사모였으니 사람들이 잘 모였다. 주로 이불이나 그릇을 사기 위한 이불계, 그릇계를 했다. 당시 은행 이자가 24%였다고 하니 여럿이 모은 돈을 운영하면 그나마 살림을 꾸릴 수 있었던 모양이다.

어머니가 매달 필요한 이불이나 그릇을 마련하기 위해서 진주로 나가면 젖먹이 해성은 고모 등에 업혀 젖동냥을 다녔다. 시골의 젖인심은 후했지만 모유를 제대로 먹지 못해 큰키의 아버지에 비해 키가 작다. 하지만 여러 사람의 젖을 먹어서 그런지 건강하고 다부지다고 자부한다. 그렇게 교장 아들 해성은 배를 곯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한국전쟁 후 빨치산 출몰하던
오지 초등학교 자원하신 父
도토리 모아 만든 '가랑잎장학회'
화전민 아이들 모두 중학교 보내
"아버지처럼 좋은 선생님 되겠다"


■ 죽어도 선생은 안 된다


해성의 아버지는 28세에 교장이 됐다. 전쟁 후의 혼란 상태였다. 지리산에는 여전히 빨치산들이 출몰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지리산 아래 삼장면에 학교는 다시 열어야 했다. 지원하는 교사가 없었다. 생명이 보장되지 않아서이다. 아버지가 자원을 했다. 그래서 교장이 되어 갔다. 삼장초교 사택에서 해성이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지리산에서 보낸 해성은 산청군 단성면 백곡초등학교에 입학한다. 아버지가 그곳으로 전근을 했기 때문이다. 4학년까지 백곡초교에서 보낸 해성은 진주로 전학을 가게 된다.

그러나 삼장초교를 못 잊은 아버지께서 다시 지리산 아래로 갔다. 아버지는 삼장초교 교장으로 있을 때인 1958년 직접 개설한 삼장초교 유평분교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다시 오지 초등학교로 자원하는 사고(?)를 치신 것이다.

당시 중학교를 다니는 누나 둘이 있어 가족들은 지리산으로 따라갈 형편이 안 됐다. 결국 어머니는 진주 서부시장에 방 한 칸을 얻어 가정을 꾸려나갔다.

삼장초교 유평분교는 세간에 가랑잎초등학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 이름을 지은 사람이 해성의 어머니였다.

한번은 신문기자가 학교 기사를 쓴다며 좋은 애칭이 없냐고 물었다. 대답을 고민하는 아버지 곁에서 어머니는 이랬다. "화전민 아이들이 가랑잎을 밟고 안오능교. 학교 애칭이 가랑잎이 어떻습니까."

가랑잎초등학교라는 명칭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삼장초교로 온 아버지는 중학교에 진학해야 할 졸업생이 학비가 없어 발을 동동 구르자 동네사람들과 함께 장학회를 만들었다.

가랑잎장학회다. 지리산에서 싸리나무를 베어 싸리비를 만들고 도토리를 주워 팔아 거금 100만 원을 모았다. 화전민 아이들은 모두 중학교에 들어갔다. 아버지는 여전히 월급 한 푼 집에 가져오지 않았다. 가난은 깊어졌다.

진주 서부시장은 개도살시장이었다. 밤이면 구슬픈 개울음이 소년의 귓가를 적셨다. 개도 슬프게 우는 것을 처음 알았다. 가족을 굶기는 교장 아버지. 교사는 좋은 직업이 아니었다.


■ 파란만장 중고생 시절

하루에 밥 한 끼. 도시락을 싸가는 것은 엄두도 못 냈다. 진주중학을 다닐 때였다. 짝지가 물었다. "니는 왜 도시락을 안 싸오노? 내 것 갈라 묵을래." 명색이 교장 아들인 것을 친구들은 알았다. 그래서 쌀이 없어서 도시락을 싸 오지 못한다는 생각은 추호도 못했다. 그래도 계속 도시락을 안 싸오니 친구가 도시락을 나눠먹자고 제안을 했다.

"응, 내가 위장이 좀 안 좋다. 그래서 점심을 안 묵는다 아이가." 해성은 점심시간이면 운동장에 나가 수도꼭지를 입에 틀어넣었다. 하지만 물은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았다. 괜히 거짓말을 했다고 무척 후회를 했다.

아버지가 가랑잎장학회를 만들고 아이들을 잘 지도한 공로를 인정받아 도시 학교로 전근 발령이 났다. 지리산을 떠나기 싫은 기색이 역력했지만 "우리도 도시에서 한번 살아봅시다"는 어머니의 권유에 발령을 받았다. 부산 사하구 신평

초등학교 교장으로 전근을 한 것이다.


해성도 부산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보기좋게 미역국을 먹었다. 한 해 재수를 해서 동래고에 들어갔다. 촌놈 해성이 특히 잘한 것은 운동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이었을까. 권투를 배웠다. 그래도 마음이 약해 남을 때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고향 지리산 대원사골에 갔다. 전국 각지에서 온 학생들과 시비를 붙었다. 10 대 1의 싸움에서 단 한 방도 맞지 않았다. 때릴 기회가 왔을 때도 마음이 약해 때릴 수 없었다. 진주 육거리에서는 깡패들과 30 대 1로 붙어 지지 않고 몰고 다닌 추억이 있다. 학내에서도 폭력서클 친구들이 손을 내밀었다. 조폭이 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착한 심성의 근본을 바꿀 수는 없었다.


"개천에서도 용은 나올 수 있다" 
친구·후원자 700여 명 뜻 모아 
지리산 모교에 대안학교 세워 
무상교육으로 참인간 만들기 실험 
올 여름부턴 인성 프로그램 운영


■ 반드시 선생님 할거야


지리산고는 교장실이 따로 없다. 운동장 천막이 교장실이다. 박해성 교장이 천막 교장실에서 일정을 살펴보고 있다. 김병집 기자

한 번은 웬 청년들이 집으로 찾아왔다. 아버지를 찾아온 제자들이었다. 알고 보니 이들은 가랑잎장학회의 도움으로 중학교에 진학했던 학생들이었다. "선생님 덕택으로 이렇게 컸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아버지와 제자들은 손을 맞잡고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는 중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이 공부와 일을 병행할 수 있도록 창원과 부산 등지의 산학협동 고등학교에 입학시켰다. 졸업한 학생들의 취직도 도왔다.

부산에서도 아버지의 장학 활동은 계속됐다. 부산 사하구 신평동도 가난한 학생들이 많았다. 그런데 이런 학생들을 돕는 천사 할아버지가 있었다. 지게꾼 이석숭 할아버지였다. 월남한 이석숭 할아버지는 어렵게 번 돈을 모아 이웃을 돕고, 신평초교 아이들에게도 장학금을 줬다.

지게꾼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유산을 학교에 기증했다. 그리고 유언을 했다.

"박 교장, 내가 전당포 두 곳에 장례비 쓰려고 금 10돈 씩을 맡겨 놨어. 나중에 찾아 장학금으로 써." 할아버지는 모든 것을 다 주고 가셨다.

아버지가 전당포에 금붙이를 찾으러 갔다. 그런데 한 전당포는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뗐다. 한 1년이 지났을까. 그 전당포 주인이 금 10돈을 들고 학교로 찾아왔다. 정말 미안하다는 사과와 함께. 양심의 가책이 되서 못 견뎠다고 했다.

이석숭 할아버지는 부산 영락공원에 모셨는데 대학생이 된 장학금 수혜자들이 해마다 기일이 다가오면 꽃을 놓고 갔다. 해성은 아버지 같은 좋은 선생님이 되기로 결심했다.




■ 학생들은 참 가난했다


지리산고등학교 교정은 박해성 교장의 모교이기도 하다. 박 교장은 폐교가 된 모교 백곡초교를 사들여 지리산고를 창설했다. 700여명 후원인 덕분에 가난한 아이들도 마음놓고 다닐 수 있는 학교가 지리산고등학교이다. 김병집 기자 bjk@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첫 발령지가 창원시 대산중학교였다. 아이들은 대부분 가난했다. 신발을 안 신고 다니는 아이들도 부지기수였다. 중1 담임을 맡아 자전거를 타고 가정방문을 갔다.

신출내기 박 교사가 가정방문을 간 곳은 온천으로 유명한 마금산. 담임이 왔다고 학생의 아버지가 담배 심부름을 시켰다. 500원짜리 고급담배를 사 오라고 했는데 100원짜리 청자 다섯 갑을 사 왔다. 담배를 받을 수 없다고 거절하니 막무가내였다.

교사가 되면 일절 촌지는 받지 않을 것이나 성의로 주는 담배 한 갑 정도는 거절 않겠다는 그 나름의 원칙을 세웠다. 다섯 갑을 주길래 안 받으려고 하니 세 갑을 주셨다. 다시 한 갑을 돌려드리며 기분좋게 나눴다. 권하는 막걸리는 조금씩 받아 마셨는데 정작 귀가할 때는 취기가 올라 자전거를 끌고 와야 했다.

어느날 부산 본가에 우환이 생겼다. 부모를 가까이 모셔야 할 처지가 되었다. 어쩔 수 없이 부산으로 전근을 갔다. 계성여상이었다.

교사를 해도 벽지나 낙도를 가고 싶었는데 중등 교사가 되다 보니 그럴 기회가 적었다. 여상 학생들도 가난하기는 시골보다 더 했다. 공동묘지 한가운데 집이 있는 학생들도 많았다. 가정방문을 간다니 모두 도망을 갔다. 한번은 술을 과하게 드시는 아버지와 사는 학생이 있었다. 그 학생은 술 마시는 행위에 혐오감을 가졌다. 가정방문을 가니 학부모가 학생에게 술을 받아오라고 시켰다. 학생은 거부했다. 박 교사는 "내 부탁이다 술 한 병 받아와라." 그러고나자  제자는 '우리 선생님도 술을 드시네' 하며 자기 아버지의 음주를 이해하는 듯 했다.



■ 학림학원을 결의하다





느티나무 그늘에서 야외수업. 소수 정예라 수업방식이 자유롭다. 김병집 기자

'가난하다고 배움의 기회를 놓쳐서야 되겠는가?' 박 교사는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불우한 환경을 겪는다고 해서 흙속의 진주를 묵혀둘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고민이 깊어지자 무엇을 어떻게 할지 계획을 세워야 했다. "그렇다. 가랑잎 정신이 살아 있는 학교를 만들자." 박 교사의 새로운 교육을 위한 마스터플랜이 시작됐다.

요즘은 부모의 재산으로 교육이 이루어진다. 개천에서 용이 안 난 지는 오래되었다. 박 교장은 개천에서도 용이 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뜻이 있는 교사와 지인들을 설득했다. 마침 자신의 모교인 백곡초교가 학생 수 감소로 폐교가 되었다. 그 학교를 사들여 대안학교를 만들기로 했다. 오랜 세월 자신을 지켜보고 인정해 온 친구들과 후원자 700여 명이 모였다. 덜렁 학교를 샀다. 학교 부적응아이를 모아 수업을 시작했다. 주중 휴일제로 바꿔 토요일과 일요일이면 부산에서 산청으로 와 수업을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특성화 고등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자신이 가난하더라도 베풀어라.' 아프리카 잠비아 출신 학생을 받아들여 명문대에 진학을 시켰다. 지리산고등학교라는 이름이 전국에 알려졌다. 그러나 명문대 진학이 목적이 아니라 지리산고는 가난한 아이들이 무상교육을 받아 참된 인간으로 교육시키는 학교이다.

박 교장은 이런 학교가 전국에 많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올해 여름방학부터는 지리산고 부설 남명두류학당에서 인성교육에 매진할 계획이다. 4박5일 일정의 인성 발견 프로그램을 통해 입시기계가 아닌 인간을 먼저 가르치려고 한다.

지리산고에 이은 새로운 실험이 한국 교육계의 또 하나의 이정표로 우뚝 설 것인가. 박해성 교장은 "제 전화번호가 017-846-3723입니다. 교육과 관련해서 언제든지 연락주시면 됩니다"고 화끈하게 웃었다.

이재희 기자 jaehee@busan.com

약력

1956년 경남 산청군 삼장면 삼장초교 사택서 출생

1969년 진주 배영초교 졸업

1972년 진주중학교 졸업

1976년 부산 동래고 졸업

1983년 부산 동아대 졸업

1983년 창원 대산중학교 교사 부임

1984년 부산 계성여상 전근

1990년 부산 경성대 수학교육과 석사

1998년 학림학교 후원회 결성

1999년 부산 남성여중 전근

2002년 산청 단성면 백곡초교 인수

2003년 학림학원 지리산고 특성화고 인가

2003년 학림학원 초대 이사장

2005년 계성정보고 교사 퇴임

2005년 지리산고 교장 취임

2012년 통일부 통일교육위원 위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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