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성도 부산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보기좋게 미역국을 먹었다. 한 해
재수를 해서 동래고에 들어갔다. 촌놈 해성이 특히 잘한 것은 운동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이었을까. 권투를 배웠다. 그래도 마음이 약해 남을 때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고향 지리산 대원사골에 갔다. 전국 각지에서 온 학생들과 시비를 붙었다. 10 대 1의 싸움에서 단 한 방도 맞지 않았다. 때릴 기회가 왔을 때도 마음이 약해 때릴 수 없었다. 진주 육거리에서는 깡패들과 30 대 1로 붙어 지지 않고 몰고 다닌 추억이 있다. 학내에서도 폭력서클 친구들이 손을 내밀었다. 조폭이 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착한 심성의 근본을 바꿀 수는 없었다.
"개천에서도 용은 나올 수 있다"
친구·후원자 700여 명 뜻 모아
지리산 모교에 대안학교 세워
무상교육으로 참인간 만들기 실험
올 여름부턴 인성 프로그램 운영
■ 반드시 선생님 할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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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고는 교장실이 따로 없다. 운동장 천막이 교장실이다. 박해성 교장이 천막 교장실에서 일정을 살펴보고 있다. 김병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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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웬 청년들이 집으로 찾아왔다. 아버지를 찾아온 제자들이었다. 알고 보니 이들은 가랑잎장학회의 도움으로 중학교에 진학했던 학생들이었다. "선생님 덕택으로 이렇게 컸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아버지와 제자들은 손을 맞잡고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는 중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이
공부와 일을 병행할 수 있도록 창원과 부산 등지의 산학협동 고등학교에 입학시켰다. 졸업한 학생들의 취직도 도왔다.
부산에서도 아버지의 장학 활동은 계속됐다. 부산 사하구 신평동도 가난한 학생들이 많았다. 그런데 이런 학생들을 돕는 천사 할아버지가 있었다. 지게꾼 이석숭 할아버지였다. 월남한 이석숭 할아버지는 어렵게 번 돈을 모아 이웃을 돕고, 신평초교 아이들에게도 장학금을 줬다.
지게꾼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유산을 학교에 기증했다. 그리고 유언을 했다.
"박 교장, 내가 전당포 두 곳에 장례비 쓰려고 금 10돈 씩을 맡겨 놨어. 나중에 찾아 장학금으로 써." 할아버지는 모든 것을 다 주고 가셨다.
아버지가 전당포에 금붙이를 찾으러 갔다. 그런데 한 전당포는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뗐다. 한 1년이 지났을까. 그 전당포 주인이 금 10돈을 들고 학교로 찾아왔다. 정말 미안하다는
사과와 함께. 양심의 가책이 되서 못 견뎠다고 했다.
이석숭 할아버지는 부산 영락공원에 모셨는데 대학생이 된 장학금 수혜자들이 해마다 기일이 다가오면 꽃을 놓고 갔다. 해성은 아버지 같은 좋은 선생님이 되기로 결심했다.
■ 학생들은 참 가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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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고등학교 교정은 박해성 교장의 모교이기도 하다. 박 교장은 폐교가 된 모교 백곡초교를 사들여 지리산고를 창설했다. 700여명 후원인 덕분에 가난한 아이들도 마음놓고 다닐 수 있는 학교가 지리산고등학교이다. 김병집 기자 bjk@ |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첫 발령지가 창원시 대산중학교였다. 아이들은 대부분 가난했다. 신발을 안 신고 다니는 아이들도 부지기수였다. 중1 담임을 맡아 자전거를 타고 가정방문을 갔다.
신출내기 박 교사가 가정방문을 간 곳은 온천으로 유명한 마금산. 담임이 왔다고 학생의 아버지가 담배 심부름을 시켰다. 500원짜리 고급담배를 사 오라고 했는데 100원짜리 청자 다섯 갑을 사 왔다. 담배를 받을 수 없다고 거절하니 막무가내였다.
교사가 되면 일절 촌지는 받지 않을 것이나 성의로 주는 담배 한 갑 정도는 거절 않겠다는 그 나름의 원칙을 세웠다. 다섯 갑을 주길래 안 받으려고 하니 세 갑을 주셨다. 다시 한 갑을 돌려드리며 기분좋게 나눴다. 권하는
막걸리는 조금씩 받아 마셨는데 정작 귀가할 때는 취기가 올라 자전거를 끌고 와야 했다.
어느날 부산 본가에 우환이 생겼다. 부모를 가까이 모셔야 할 처지가 되었다. 어쩔 수 없이 부산으로 전근을 갔다. 계성여상이었다.
교사를 해도 벽지나 낙도를 가고 싶었는데 중등 교사가 되다 보니 그럴 기회가 적었다. 여상 학생들도 가난하기는 시골보다 더 했다. 공동
묘지 한가운데 집이 있는 학생들도 많았다. 가정방문을 간다니 모두 도망을 갔다. 한번은 술을 과하게 드시는 아버지와 사는 학생이 있었다. 그 학생은 술 마시는 행위에 혐오감을 가졌다. 가정방문을 가니 학부모가 학생에게 술을 받아오라고 시켰다. 학생은 거부했다. 박 교사는 "내 부탁이다 술 한 병 받아와라." 그러고나자 제자는 '우리 선생님도 술을 드시네' 하며 자기 아버지의 음주를 이해하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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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 그늘에서 야외수업. 소수 정예라 수업방식이 자유롭다. 김병집 기자 |
'가난하다고 배움의 기회를 놓쳐서야 되겠는가?' 박 교사는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불우한 환경을 겪는다고 해서 흙속의 진주를 묵혀둘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고민이 깊어지자 무엇을 어떻게 할지 계획을 세워야 했다. "그렇다. 가랑잎 정신이 살아 있는 학교를 만들자." 박 교사의 새로운 교육을 위한
마스터플랜이 시작됐다.
요즘은 부모의 재산으로 교육이 이루어진다. 개천에서 용이 안 난 지는 오래되었다. 박 교장은 개천에서도 용이 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뜻이 있는 교사와 지인들을 설득했다. 마침 자신의 모교인 백곡초교가 학생 수 감소로 폐교가 되었다. 그 학교를 사들여 대안학교를 만들기로 했다. 오랜 세월 자신을 지켜보고 인정해 온 친구들과 후원자 700여 명이 모였다. 덜렁 학교를 샀다. 학교 부적응아이를 모아 수업을 시작했다. 주중 휴일제로 바꿔 토요일과 일요일이면 부산에서 산청으로 와 수업을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특성화 고등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자신이 가난하더라도 베풀어라.' 아프리카 잠비아 출신 학생을 받아들여 명문대에 진학을 시켰다. 지리산고등학교라는 이름이 전국에 알려졌다. 그러나 명문대 진학이 목적이 아니라 지리산고는 가난한 아이들이 무상교육을 받아 참된 인간으로 교육시키는 학교이다.
박 교장은 이런 학교가 전국에 많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올해 여름방학부터는 지리산고 부설 남명두류학당에서 인성교육에 매진할 계획이다. 4박5일 일정의 인성 발견 프로그램을 통해
입시기계가 아닌 인간을 먼저 가르치려고 한다.
지리산고에 이은 새로운 실험이 한국 교육계의 또 하나의 이정표로 우뚝 설 것인가. 박해성 교장은 "제 전화번호가 017-846-3723입니다. 교육과 관련해서 언제든지 연락주시면 됩니다"고 화끈하게 웃었다.
약력1956년 경남 산청군 삼장면 삼장초교 사택서 출생
1969년 진주 배영초교 졸업
1972년 진주중학교 졸업
1976년 부산 동래고 졸업
1983년 부산 동아대 졸업
1983년 창원 대산중학교 교사 부임
1984년 부산 계성여상 전근
1990년 부산 경성대
수학교육과 석사
1998년 학림학교 후원회 결성
1999년 부산 남성여중 전근
2002년 산청 단성면 백곡초교 인수
2003년 학림학원 지리산고 특성화고 인가
2003년 학림학원 초대 이사장
2005년 계성정보고 교사 퇴임
2005년 지리산고 교장 취임
2012년 통일부 통일교육위원 위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