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지방의 3.1운동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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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전 의 현장>: 부산지방의 3.1운동효시.

2,307 박명식44 2019.03.29 19:03
제1장 부산(釜山)

 

1 일신여학교(日新女學校) : 현 동래여고 전신. 

 

 

일본과 가장 가까운 부산항은 근대 개항 이래 일제 조선침략의 교두보(橋頭堡)가 되어 일찍부터 많은 일인들이 거주해 왔다.
3·1운동 직전 부산분의 인구집계를 보면 조선인이 32,846명이고 일인이 28,012명, 기타 외국인이 187명으로 일인들이 전체 인구의 거의 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일찍부터 조선 항민들에 대한 경제적 수탈과 횡포는 어느 곳보다 심하였다.
전술한 바와 같이 3·1운동 직전인 1916년 9월 13일 부산진의 전차 교통사고를 계기로 순식간에 수천 명의 조선 항민들이 일시에 봉기하여 철도를 차단하고 항일 데모를 벌일 정도로 쌓이고 싸여 온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은 대부분의 항민들의 마음 가운데 그 저류를 이루어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이제 그 항일투쟁은 하나의 계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1919년 3월 1일 마침내 3·1운동이 서울에서 터졌다. 이에 앞서 독립선언서가 비밀리에 각지에 배부되고 또 고종(高宗) 인산(因山)에 참예하였던 많은 인사들이 독립선언서를 품에 품고 속속 귀향하여 서울의 항쟁상을 지방에 알리게 되었다.
3월 2, 3일경에는 기독교계통의 인사들을 토하여 ‘독립선언서’가 부산·마산에 비밀리에 배부되기 시작하였다. 또 이때 서울로부터 학생대표가 내려와 경성학생단(京城學生團)의 이름으로 부산상업학교·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대표들에게 독립선언서를 전달하고 독립운동으로의 궐기를 종용하였다.
이에 따라 일신여학교를 비롯한 각급 학교에 연락되고 이들은 모두 의거의 준비를 서두르게 되었다.
이때 일신여학교 측에서는 이명시(李明施)라는 학생이 연락병 노릇을 하였다.
3월 11일 새벽 일신여학교 기숙사 주변을 비롯한 각처에는 격문이 뿌려져 애국학생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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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더한층 설레이게 하였다. 이날 아침 일찌기 고등과 4년생 김응수(金應守)는 이 비라를 주워서 기숙사 주경애(朱敬愛)선생에게로 달려가 비라를 보였다.
교사 주경애는,
“이 비라는 중앙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라는 비라이니 비밀을 지키고 있어라.”
라고 귀띔을 해 주면서
“오늘 저녁 9시에 부산상업학교 학생들과 만세를 부르기로 했다.”고 알려 주었다.
이때 일신여학교 학생들은 교사 주경애·박시연(朴時淵)에게서 민족적인 정신감화를 많이 받고 있었다.
이에 앞서 교사 주경애는 학생들을 시켜 비밀리에 부산상업학교 학생들과 연락을 취하고 한편으로는 일신여학교의 동료 교사들을 규합하면서,
“전국 각지에서 독립운동이 개시되었으니 우리 학교에서도 거행하자.”
고 종용하여 이들과 협의 약속한 후 이 사실을 극비리에 고등과 학생들에게 알렸다.
3월 10일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기숙사 고등과 학생 11명은 독립운동의 벅찬 감격을 가슴에 안고 밤이 깊어가는 것을 기다려 벽장 속에 숨어서 밤새워 태극기 50개[일본측 기록]를 만들었다.
3월 11일 수업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와 저녁식사를 마친 고등과 학생 11명 [김응수(金應守) 또는 김수(金壽)·송명진(宋明進)·김순이(金順伊)·김난출(金蘭出)·박정수(朴貞守)·김반수(金班守)·심순의(沈順義)․김봉애(金奉愛)․김복선(金福善)․김신복(金新福)․이명시(李明施)]은 교사 주경애·박시연과 더불어 오후 9시 준비한 태극기를 손에 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기숙사 문을 뛰쳐나와 좌천동(左川洞)거리를 누비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때 거리의 대중들이 여기에 호응하였다. 학생들은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학생들과 합류한 시위 군중 수백 명은 감격에 넘친 힘찬 시위를 전개하였다. 어느덧 2시간이 경과되었다. 이때 일군경이 대거 출동하여 시위는 더 계속할 수 없었다. 출동한 군경은 여학생 전원과 2여교사를 검거하여 부산진(釜山鎭)주재소(駐在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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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치하였다. 경관들은 이들을 격리 수용을 한 후 개별 문초를 하였다.
이때 일경들은 대부분 16, 17세의 나이어린 여학생들의 뺨을 치고 구두발로 차는 등 그 만행과 횡포는 말로 다 형용할 수 없었다.
일경들의 한결 같은 문초는 주동 인물을 대라는 것이었다. 학생들은 한결같이,
“주동 인물은 없으며 우리들이 모두 주종 인물이다.”
고 우겼다. 일경의 횡포는 더욱 높아갔다.
참다못해 여학생 김응수(金應守)는,
“3살 먹은 아이도 제 밥을 빼앗으면 달라고 운다. 우리들이 우리 나라를 돌려 달라고 운동하는데 무엇이 나쁘냐?”
고 항의하자 일경은 노발대발 분을 참지 못한 나머지 뺨을 치면서.
“이런 년은 사형에 처해야 한다.”
고 위협하였다.
이같이 하여 문초가 끝난 다음 날 학생 11명과 교사 2명은 부산형무소에 수감되어 학생 11명은 징역 6개월을 언도 받고, 교사 주경애·박시연은 각각 징역 1년 6개월을 언도 받았다. 이 의거에서 학생 아닌 박연(朴蓮)이라는 16세의 처녀도 종시일관 학생들과 행동을 같이 했기 때문에 학생들과 같이 징역 6개월을 언도받아 학생들과 같이 옥고를 치루었다.
또 일신 여학교 학생 의거를 계기로 이러한 일도 있었다.
의거에 같이 모의하고 의거에도 참가하였다가 함께 검거된 교사 임말이(林末伊)와 학생 임망이(林望伊)[임말이의 동생]는 자기 형부(兄夫)인 형사에게 모의 사실 전모를 이야기하여 그의 힘으로 무사히 석방되어 둘이 다 학교에 나가고 있었다.
이 사실을 전해 듣고 극도로 흥분한 11명의 학생들은 6개월의 옥고를 치루고 출옥한 후 전교생의 힘을 빌려 이들의 추방을 학교 당국에 완강히 요구하였다. 이리하여 이들 전교생은 이들 2사람을 학교에서 내보내지 않는 이상 학교에 나가지 않겠다는 것을 결의하여 약 10일간 동맹휴학을 단행하였다. 궁지에 몰린 학교 당국은 부득이 이 2사람을 설득하여 자퇴시키고 이 사건을 수습하였다. 이 사실 통하여 우리는 이때 학생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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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지가 어떠하였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곳 일신여학교(日新女學校)의 학생의거는 경남 3·1운동의 효시를 이루어 이 이후 경남 각지에서는 만세의거가 뒤를 이어 일어나게 되었다.
이때 이들 여학생들은 모두가 16세 전후의 나이 어린 소녀들이었고, 또 이들이 일제 세력이 가장 깊이 뿌리를 박은 부산에서 용감한 시위항쟁을 전개하였다는 사실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상에 그 의의를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1).

 

 

2 동래(東萊)고등보통학교 : 현 동래고교 전신.
서울에서의 3·1운동의 소식은 이곳 동래읍(東萊邑)[당시 동래군 소속]에도 전해져 왔다. 3월 2, 3일경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독립선언서가 기독교계열을 통하여 부산시내에도 배부되었다.
이 일이 있은 후 다시 서울에서 학생대표가 부산에 내려왔다. 이들 학생대표는 곧 부산상업학교(釜山商業學校) 학생대표를 찾아가 ‘경성학생단(京城學生團)’의 이름으로 독립선언서를 전달하고 독립운동으로의 궐기를 종용하였다.
이 같은 연락을 받은 부산상업학교 학생대표는 의거의 준비를 서두르는 한편[그러나 부산상업학교는 이 기미를 눈치 챈 당국의 감시와 방해로 봉기하지 못하였다], 3월 7일에는 서울에서 내려온 학생대표[연회전문학교 김모라 함]와 같이 동래고보(東萊高普) 학생대표 김귀룡(金貴龍)·고영건(高永建)·엄진영(嚴進永) 등을 찾아가 독립선언서를 전달하고 함께 봉기할 것을 권유하고 또 협의하였다.2)
동래 고보측에서는 먼저 졸업반 4학년생인 엄진영(嚴進永)·김귀룡(金貴龍)·고영건(高永建)·김인호(金仁浩)·이상덕(李相德)·박득룡(朴得龍)·윤삼동(尹三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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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1절 52돌에 되돌아보는 일신여학교 주동 인물들의 좌담(≪국제신보≫[1917년 3월 1일자]). 김의환, ≪3·1운동 반세기≫≪국제신보≫ 1969년 2월 13일. 김정명(金正明), ≪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 I. p321·341·354, pp.367~368 ≪고등경찰관계 적록(高等警察關係摘錄)≫[1931년 12월 경상남도 경찰부편] pp.5~6. ≪조선3·1독립소요사건(朝鮮三一獨立騷擾事件)≫[조선 일군 헌병대 사령부편] pp.79~80. ≪일신여학교동창회 명부≫. 필자가 한 생존 주동 인물들(김응수·송명진·김난출≫)에 대한 조사.
2) 김귀룡(金貴龍) 외 2인의 판결문[1919년 6월 27일 대구복심법원]. 김정명(金正明), ≪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 I. p. 321, 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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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심(李炳芯)·손정줄(孫廷茁)·배대효(裴大孝)·박임갑(朴壬甲)·김철규(金哲圭) 등 사이에 모의가 시작되고 이어서 3학년생 추규영(秋圭映)·김원룡(金元龍)·김기삼(金琪三)·손영수(孫永壽)·정호종(鄭浩宗)·박종관(朴鍾寬)·서진랭(徐鎭冷) 등과 2학년생 이수열(李守烈)·임명조(林命祚)도 모의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학생들에 의해 구체적으로 모의가 무르익어 갈 무렵, 즉 3월 10일경 그 당시 동래고보(東萊高普)를 졸업하고 경성고등공업학교(京城高等工業學校)에 다니던 곽상훈(郭尙勳)이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서울에서 동래로 내려왔다.
그는 인쇄된 독립선언서 원본을 그대로 가져 올수 없었기 때문에 문창호지(門窓戶紙)에 베껴 그것을 찢어서 노끈을 꼬아 몰래 숨겨 가지고 왔다.
곽상훈은 곧 당시 동래 고보 수학교사(數學敎吊)인 이환(李環)을 찾아 독립선언서를 보이면서 이 곳에서의 의거를 상의하였다.
이환은 즉석에서 이를 쾌락(快諾)하여 이에 이들이 동래고보 학생의거의 배후 참모역할을 담당하게 됨으로써 의거의 계획은 보다 무르익어 갔다.
이때 동래 고보에는 교사 김병규(金秉圭)가 지리(地理)를 담당하면서 몰래 조선사(朝鮮史)를 학생들에게 강의해 주고 있었기 때문에 학생들의 민족의식은 고취되어 가고 있었다.
주동 학생들은 동래 학수대(鶴首臺)와 복천동(福泉洞)에 있던 엄진영(嚴進永) 집의 사랑채와 역시 복천동에 있던 오종식(吳宗植) 집 사랑채 및 수안동(壽安洞)에 있던 정종호(鄭宗浩)·백정기(白正基)·고영건(高永建) 등의 하숙방을 전진하면서 모의하였다.
우선 이들은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태극기와 독립만세(獨立萬歲)기를 제작하기로 하고 거사를 3월 31일[음력 2월 12일]동래읍(東萊邑) 장날 오후 2시에 단행하기로 약정하였다.
학생대표들은 3월 11일부터 3월 13일 새벽에 걸쳐 고영건이 하숙하고 있던 수안동(壽安洞) 이한주(李漢周) 집 하숙방에서 의거의 준비를 서둘렀다.
학생 주동 인물들은 학교 등사판을 이 곳으로 옮긴 후 서진랭·엄진영·김인호(金仁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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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 교대로 독립선언서 5백 매를 인쇄하고 같은 장소에서 다른 학생 주동 인물들은 ‘대한국독립만세(大韓國獨立萬歲)’라고 해서 특별한 2개의 큰 기치와 수백 매의 태극기 및 ‘오왕약살(吾王藥殺)’이라고 대서한 수백 매의 비라도 준비하였다.
이와 같이 만단준비를 갖춘 동래고보 주동 학생들은 동래 장날인 13일 약속된 오후 2시가 가까와 오자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품에 품고 기타는 동리 부인네들이 감추어 동래 군청 앞으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약속된 오후 2시가 되자 엄진영(嚴進永)은 군청 앞 망미루[속칭 폐문루 : 옛날의 군청 정문]에 올라 태극기를 흔들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주위에 모였던 40여 명의 학생들과 장꾼들도 일제히 여기에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불렀다.
동시에 ‘대한국독립만세(大韓國獨立萬歲)’라고 쓰여진 2개의 기치가 세워지고 독립선언서와 ‘오양약살(吾王藥殺)’이라고 대서한 수백 매의 비라가 뿌려져 장시(場市)는 삽시간에 흥분의 도가니로 화하였다.
이때 학생들의 동태를 살펴오던 수명의 경찰들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 가운데 조선인 경찰 1사람은 감격적인 순간을 당하자 제모(制帽)와 제복(制服)을 벗어 버리고 속옷 바람으로 군중에 호응하여 만세를 부르고 조선인 헌병 보조원 1사람도 정복(正服)을 벗어 버리고 감격에 넘친 만세를 불렀다.
참으로 민족정의(民族正義)의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도 오래 가지 않았다.
마침내 기마경찰 20~30명과 일군 50명이 들이 닥쳤다. 이들은 야만적인 발포를 하면서 주동 학생들을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엄진영(嚴進永)·고영건(高永建)·서진랭(徐鎭冷)·김귀룡(金貴龍)·김인호(金仁浩)·정호종(鄭浩宗)·송영수(孫永壽)·이상덕(李相德)·김원룡(金元龍)·엄병영(嚴秉永)[또는 정우(正友)]·이수열(李守烈)·김성조(金聖祖)·추규영(秋圭映)·박득룡(朴得龍)·김기삼(金琪三) 등 22명이 검거되어 재판을 받아 각각 징역 1년 6개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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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역 4개월을 언도 받았다.
특히 이들이 재판을 받을 때 그 변호를 맡은 변호사 이조원(李祖遠)은 법정에서,
“개 1마리가 짖으면 동리 개가 짖는 법이고, 닭 1마리가 울기 시작하면 동리 닭들이 전부 따라 우는 법인데, 어린 학생들이 만세 1번 따라 불렀다고 무슨 죄가 될 것이냐?”
고 학생들을 변호하였다. 또 학생들이 갇혀 있는 동안 동래 사람들 전체가 누구집 식구라고 구별하지 않고 사식(私食)을 차입해 주는 동족애에 뭉친 눈물겨운 사실도 있었다.
이들 주동 학생들은 모두 고된 형기를 마치고 출옥하였는데, 이때 김인호(金仁浩)는 부상을 입고 출옥하였다.
특히 이들 가운데 김성조(金聖祚)는 ≪기려수필(騎驢隨筆)≫에서
‘김성조는 동래 고보 생도라. 기미년 봄 성조는 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위운동을 하다가 마침내 체포되었다. 옥에 있을 때 병을 얻어 1년 신음하다가 병이 날로 더하여 익년 2월에 가출옥되었다. 병을 치료하였으나 심한 음형(淫刑)을 당하여 뿌리 깊이 병이 고질화되어 마침내 죽고 말았다. 원근 인사들이 슬픔을 감출 수 없어 부의금을 모아 장례를 치루었거니와 장례 때 조객이 천여 인이나 되고, 만뢰(輓誄)·조기(吊旗)가 수백에 이르고, 동교 생도들은 특히 그 정을 잊을 수 없어 붉은 글을 쓴 만장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달고 상렬(喪列)을 따랐다······’
라고 기록해 놓았다. 이를 통하여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이때 어린 학생들에 대한 일경들의 고문이 얼마나 악독하였고 또 이러한 악독한 고문으로 숨진 애국학생 김성조에 대한 민중들의 동족애에 불타는 동정이 어떠하였던가를 잘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당시 애국 민중들의 불타는 항일투지를 그대로 잘 엿볼 수 있다.
한편 동래고보 학생의거의 배후 참모역을 한 곽상훈(郭尙勳)은 서울로부터 체포령이 내렸다는 소식을 듣고 상해로 망명을 계획하게 되었다. 그는 떠나는 전날 이별주(離別酒)를 나누는 동안 어떤 이의 밀고로 검거되어 대구·영등포·인천 등지로 압송되었다가 마침내는 서울 종로경찰서에 구치되어 예심 8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그리고 상술한 동래 고보 학생들의 의거 후인 다음 장날인 3월 18일 오후 9시에는 의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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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친 이곳 애국군중 약 1백 명[일 경찰 기록에는 약 50명]이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동래경찰서로 몰려가 시위를 하고 헤어졌다.
이러한 동래 고보 학생들과 애국군중들의 의거 후 학생들의 항일저항의식은 더욱 앙양되어 갔다.
이러한 때 동래공립보통학교(東萊公立普通學校)졸업생과 재학생들도 의거의 모의를 서둘렀다.
즉 동래공립보통학교 손지수(孫志守) 외 1명은 졸업생 및 2학년 이상의 학생들과 같이 4월 23일 식수기념일(植樹記念日)에 거사를 할 계획 아래 각자 태극기를 만들면서 의거의 준비를 서두르다가 사전에 당국에 탐지되어 주동 인물 10명이 검거되는 사건도 일어났다.
부산·동래에 있어서의 이 같은 학생들의 의거는 지방 학생들과 젊은 청년들에게 큰 영향을 주어 이들로 하여금 독립 투쟁의 대열에 앞장서게 하였다.
한편 동래 고보 학생의거의 주동 인물은 형기를 마치고 출옥한 후 ‘붉은 저고리 친목회’를 조직하여 재결하고 3번이나 회합을 가졌으나 4번째 회합에서 발각되어 강제 해산을 당하였다.3)

 

 

3 동래(東萊) 범어사(梵魚寺) 학생의거
3·1운동 전 동래 범어사에는 국민학교 과정의 명정학교(明正學校)와 중등학교 과정[3년]의 지방 학림(地方學林)이 있었다.
이곳 범어사에서는 이들 학생이 주동이 되고 불교계 지도층이 배후의 비밀 참모가 되어 학생의거가 일어났다.
서울에서 민족적인 3·1의거가 무르익어 가던 2월 하순령 불교계를 대표하는 한용운(韓龍雲)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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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김귀룡(金貴龍) 외 2인의 판결문 [1919년 6월 27일 대구복심법원]. 추규영(秋圭映), ≪동래고보사건(東萊高普事件)≫. (≪신동아≫ 1965년 3월호 pp.107~108. ≪기려수필(騎驢隨筆≫ 국사편찬위원회 판 p.276. ≪조선소요사건상항(朝鮮騷擾事件狀況)≫ 조선 일군 헌병대 사령부편 p.105. 김의환,≪3·1운동반세기≫ ≪국제신보≫ 1969년 3월 1일자. 이용락(李龍洛), ≪3·1운동실록(三一運動實錄≫ pp.602~606, 김정명(金正明) 편 ≪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 I. p.328, 367, 396·동래 고보 의거 주동인물[金仁浩]과의 대담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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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범어사로 내려와 그곳 주지 오성월(吳星月)을 비롯하여 이담해(李湛海)·오이산(吳梨山)을 만나 중대사를 의논하고 서울로 올라갔다.
오성월·이담해·오이산은 곧 범어사에 관련되는 김법린(金法麟)·김영규(金永奎)·차상명(車相明)·김상기(金相琦)·김한기(金漢琦) 등 7명이 대표자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이 자리에서 오성월·이담해·오이산은 이들에게 앞으로 있을 서울의 3·1거사를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이 자리에 모인 7명 범어사 대표로서 서울 3․1거사에 참가하기로 결정하고 곧 상경하였다.
이 가운데 김법린(金法麟)은 한용운의 지시에 따라 3월 4일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먼저 범어사로 내려왔다. 한편 서울 3·1의거에 참가하였던 나머지 범어사 대표들이 감격에 넘쳐 귀향했을 때는 이미 동래 고보 학생의거가 있는 후였다.
이들은 곧 이곳 범어사에서도 범어사 중심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의거를 단행하기로 결정하고 서울의 3·1의거를 학생들에게 이야기하면서 이들을 규합하였다.
이리하여 이들은 거사일을 3월 18일 [음력 2월 17일]동래읍 장날로 약정하였다.
주동 인물 김영규(金永奎)·차상명(車相明)·김봉환(金奉煥)·김상기(金相琦)·김한기(金漢琦) 등 5명은 3월 17일 저녁 범어사내에서 개최된 명정학교·지방학림양교 졸업생 송별회 석상에서 이 곳에 모인 30~40명의 학생들에게 교대로 거의의 목적과 방법을 이야기하여 즉석에서 이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30~40명의 학생들은 결사적으로 거의할 것을 굳게 다짐하였다.
이때 이미 독립선언서는 허영호(許永鎬)에 의해 1천 매가 준비되어 태극기도 큰 것 1개와 적은 것 1천 매가 주동 인물들에 의행 준비되어 있었다. 허영화는 그때 집이 동래읍(東萊邑) 장터에 있었기 때문에 준비된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미리 가 대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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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때 한용운(韓龍雲)은 41세로 불교중앙학림(佛敎中央學林)의 교수이며 강원도 백담사(白潭寺)의 승려였다. 그는 2월 10일 최인(崔麟)으로부터 3·1운동 계획을 듣고 여기에 찬성하여 동지이며 서울 봉익동(鳳翼洞)에 거주하던 해인사(海印寺)의 중 백용성(白龍宬 ; 56세)에게 상의하여 불교계대표로 3·1운동에 참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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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7일 저녁 졸업생 송별회에서 김영규(金永奎)의 축사(祝辭)가 끝나고 그의 선창으로 독립만세를 고창한 후 이들 약 40명은 야음을 틈타 동래읍(東萊邑)으로 향하였다.
범어사를 출발한 이들은 비밀을 지키기 위해 도로를 따라가는 것을 피하고 선리(仙里) 뒷산과 동래 향교(鄕校) 뒷산을 넘어 동래읍으로 들어갔다.
동래읍 복천동(福泉洞)에 있는 불교포교당(佛敎布敎堂)에 도착한 것은 18일 새벽 1시가 조금 넘었을 때였다. 이들은 공복을 채우기 위행 시장 곶감 5접을 사와 막 먹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일군경 20명이 들이닥쳤다. 이들은 김영규(金永奎)·차상명(車相明)·김상기(金相琦)·김한기(金漢琦) 등을 호명하여 경찰서로 연행하고 나머지는 강제로 해산시켜 버렸다.
이같이 비밀이 누설된 것은 당시 명정학교 학생 오계운(吳啓運)이 자기의 선생인 중촌(中村)이라는 일인에게 일러바쳤기 때문이었다.
비밀이 누설되어 강제 해산을 당한 이들은 일단 그 곳을 물러나와 다시 의거할 것을 모의하였다.
3월 18일 밤 이근우(李根雨)·김해관(金海管)·김재호(金在浩)·박재삼(朴在森)·신종기(申鍾驥)·윤상은(尹相殷)·박영환(朴永煥) 외 40명의 명정학교와 지방 학림 학생들은 동래읍 서문(西門) 부근에서부터 운동을 전개하여 한국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동래 시장을 거쳐 남문(南門)에 이르기까지 운동을 전개하고 해산하였다.
그날 밤 다시 이들은 비밀 모임을 갖고 19일에는 보다 더 큰 의거를 단행할 것을 맹약하였다.
19일 아침 윤상은(尹相殷)·허영호(許永鎬)·이영우(李永雨)·황학동(黃鶴東) 등은 먼저 허 영호가 작성한 ‘일사는 자유를 얻는 것만 같지 못하다[一死莫如’得自由]라는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격문을 수백 매 작성하여 동래시장 통에서 군중들에게 미리 배부하고 이날 저녁에 있을 시위에 대비해 갔다.
19일 오후 5시경 이근우(李根雨)·양수근(梁壽根)·김영식(金永植)·오시권(吳時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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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만우(黃滿宇)를 비롯한 수10명의 양교 학생들은 동래시장 남문 부근으로부터 시위를 전개하여 대한 독립만세를 연호 고창하면서 동래경찰서 앞으로 돌진하였다.
한편 오후 6경에는 김해관(金海管)·김재호(金在浩)·최응권(崔應勸)을 비롯한 수 10명의 다른 학생들은 위의 시위에 이어 별도로 동래읍 시장에 집합하여 ‘대한 독립만세’를 연호 고창하면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아침내 일경의 무자비한 탄압이 닥쳐오고 주동 인물 검거가 계속되었다.
이곳 범어사 학생의거에 관련, 검거되어 재판을 받은 사람은 차상명(車相明)·김한기(金漢琦)·김상기(金相琦)·정성언(鄭聖彦)·김해관(金海管)·양수근(梁壽根)·이근우(李根雨)·박재삼(朴在森)·허영호(許永鎬)·최응권(崔應勸)·김태준(金泰俊)·박창두(朴昌斗)·이달실(李澾實)·박정국(朴楨國)·윤상은(尹相殷)·김상헌(金祥憲)·손태연(孫泰淵)·김충념(金忠念)·황학동(黃鶴東)·신종기(申鍾驥)·오병준(吳柄俊)·오점술(吳點述)·김영규(金永奎)·이영우(李永雨)·박영주(朴永珠)·지용준(池龍焌)·양춘도(楊春到)·손군호(孫君浩)·황만우(黃滿宇)·김영식(金永植)·오긍상(吳亘祥)·김재호(金在浩)·오시권(吳時勸)·박영환(朴永煥) 등 34명에 달하였다. 이 가운데 김영식·박재삼 2인은 6년 집행유예로 석방되고 나머지는 6개월 내지 2년의 징역언도를 받아 부산 또는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었다.
한편 이곳의 의거 배후 참모 역할을 한 김법린(金法麟)은 일경의 경계망을 피하여 상해(上海)로 탈출하였다.
3·1운동 후 범어사 명정학교(明正學校)와 지방학림(地方學林)은 해체되고 그 후 중등 3년 과정의 불교전문학원이 설치되어 8·15 해방 전까지 존속되어 있다.
이곳 학생의거를 기념하기 위해 1970년 3월 1일 범어사 입구인 동래구 선리동(仙里洞) 금정중학교(金井中學校) 구내에 이곳 유지들에 의해 ‘3·1운동유공비(三一運動有功碑)’가 건립되었다. 그 비문(碑文)은 다음과 같다.
‘잃은 주권과 빼앗긴 자유를 한사코 찾겠다는 겨레의 비원이 일천 구백 십구년 기미삼월 일일 역사의 권위와 세계의 대세를 순응하여 우렁차게 선포되었을 때 그 메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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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리강산에 울려 퍼지고 그 형세 요원의 횃불처럼 광야를 휩쓸었다. 이곳 금정산 기슭 호국의 전통이 스며 있는 수월도량에서도 제세의 사명을 통절히 자각하고 구국의 비원을 불전에 맹세하며 분연히 일어서니 이는 곧 나라와 자유 없는 곳에 진정한 불법 있을 수 없다는 대승정신의 발로라 할 것이요 삼월 십팔일 동래 시장통에서 젊은 님들이 민족의 정기에 호소하고 우리의 주장을 널리 선포하여 만세 소리가 하늘에 진동하고 운집한 군중이 거리를 메꾸었을때 삼엄한 왜경의 경계도 정의의 전진을 막지 못하였음은 우리의 정당한 권리를 행사함이요, 체포되어 모진 고문과 가혹한 옥고에 시달리면서도 끝내 굴하지 않음은 나라와 자유를 찾으려는 우리의 결심을 저들이 꺾지 못함이라. 아아 그 뜻 장할시고 세월이 흘러 님들은 가고 또 가고 거룩한 위국정신과 훌륭한 그 업적은 해방된 조국에서 자유를 누리는 후생들의 가슴에 불명의 빛이 되고 엄숙한 교훈이 될 것인 바 여기 뜻있는 사람들이 이 사연을 돌에 새겨 길이 전하고자 하매 그 뜻을 적고 함께 가신 분의 명복과 생존하신 분의 여생을 축복하는 바이다.
일천 구백 칠십년 삼월 일일
정중환은 글 짓고 배재식은 쓰다.5)

 

 

4 구포시장(龜浦市場)
구포는 낙동강(洛東江) 좌안(左岸)에 위치하여 북은 양산(梁山), 남은 부산(釜山), 서는 김해(金海), 동은 산을 넘어 동래(東萊)·울산(蔚山)으로 통하는 요충지대에 해당하고 또 경남 각지에 대한 수륙 운송의 중계지로 고래로부터 상업이 번성하였다. 이곳 시장은 시가 중앙에 위치하여 3.1운동 당시 이곳 시장의 하루 거래액은 이때 돈으로 1천 5백 원에 달하였던 것이니 당시 이 부근 다른 장시(場市)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대 거래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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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김영규(金永奎) 등 13명의 판결문 [1919년 5월 20일 대구복심법원]. 김한기(金漢琦), ≪범어사사건(梵魚寺事件)≫ ≪신동아≫ 1965년 3월호 pp.108~109. 김정명(金正明), ≪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 I p.396. 이용락(李龍洛), ≪3·1운동실록(三一運動實錄)≫ pp.607~611. ≪고등경찰관계적록(高等警察關係摘錄)≫ 1936년 12월 경상남도 경찰부 p.15. 김의환, ≪3·1운동반세기≫, ≪국제신보≫ 1969년 2월 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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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상업 중심지 구포에도 서울 3·1운동의 소식과 아울러 인근 부산·동래읍의 감격적인 민족의거의 소식이 전해져 이곳 애국 주민들의 가슴을 부풀게 하였다.
이러한 3월 중순 어느날 구포 사람으로 당시 경성의학전문학교(京城醫學專門學校)에 다니는 양봉근(楊奉根)이 구포로 내려왔다. 그는 평소 안면이 있고 또 당시 구포면 화명리(華明里)에 살고 있던 구포면(龜浦面) 서기(書記) 임봉래(林鳳來)를 찾아가 서울·평양의 3·1운동소식을 상세히 전하고 독립선언서를 제시하면서 구포에서도 거사할 것을 종용하였다. 임봉래는 이를 쾌히 승낙하였다.
양봉진은 다음날 다시 임봉래 집에서 윤경(尹涇)과 유기호(柳基護)를 만나 이들에게도 거사를 당부하고 서울로 올라갔다.
3월 하순으로 접어들면서 임봉래․윤경․유기호를 중심으로 이곳 청년 유지들의 거사의 모의는 무르익어 갔다.
3월 27, 28일 주동 인물인 임봉래·유기호·윤경·김옥겸(金玉兼)·김윤길(金潤吉)·허정(許楨)·김용이(金用伊)·최종호(催宗鎬)·유진영(兪鎭榮)·윤대근(尹大根) 등은 구포면 구포리(龜浦里) 박영초(朴永初)·이수련(李守連) 집에 모여 모의를 거듭한 끝에 3월 29일[음력 2월 28일]구포 장날을 이용하여 구포시장에서 거의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들은 교대로 밤을 세워가면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각각 수백 장 만들었다.
그리고 거사 전날 밤에는 넓은 폭의 광목으로 큰 태극기 하나와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라고 대서 특별한 플래카드도 만들었다.
3월 29일 예정된 장날은 닥쳐왔다. 주동 인물들은 준비된 독립선어서와 태극기를 미리 비밀리에 박덕홍(朴德弘)·손진태(孫晋泰)·김장학(金章鶴)·이몽석(李夢石)·양대용(梁大溶)·김영길(金永吉)·정치호(鄭致浩)·권용학(權龍鶴)·안화중(安華重)·허희중(許希中)등 청년 유지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날 정오(正午) 이들은 구포시장에서 장꾼 1천여 명과 더불어 ‘대한독립만세’를 고창 연호하였다. 장시는 삽시간에 흥분과 감격의 도가니로 화하였다.
박덕홍(朴德弘)은 큰 태극기를 흔들면서 또 안화중(安華重)은 시위를 위해 시장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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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문을 호소하면서 장꾼을 지휘하였다.
김윤길(金潤吉) 외 수명은 구포면 사무소로 달려가 면장 윤영태(尹永台)에게,
“너는 조선사람인데 왜 오늘의 시위운동에 가담하지 않느냐! 지금이라도 곧 참가하라!”
고 외치면서 죽편(竹鞭)으로 책상을 치면서 민족적 양심으로 뉘우칠 것을 촉구하였다.
이때 김옥겸(金玉兼) 외 11명의 주동 인물이 현장에서 경찰에 검거되어 구포주재소에 구금되었다.
군중들의 분노는 참을 길이 없었다.
임봉래(林鳳來)·윤정은(尹正殷)·변봉엽(邊奉燁)·허정(許楨) 등은 구금된 애국동지를 석방하라고 외치면서 청년 동지 윤장수(尹章守)·김달수(金澾洙)·백인봉(白仁鳳)·윤경봉(尹敬奉)·박용수(朴龍水)·박영초(朴永初)·강석이(姜碩伊)·노원필(盧源弼)·도우황(都宇黃)·허치옥(許致玉)·박도백(朴道伯)·김덕원(金德元)·신성집(申性執)·강두조(姜斗兆)·조해규(趙海奎)·박석오(朴碩五)·진유관(陳有寬)·김용이(金用伊)·윤대근(尹大根) 등과 더불어 1천 2백여 명의 군중을 지휘하여 주재소로 돌진해갔다. 때는 오후 3시가 조금 넘은 때였다.
격노한 군중들은 주먹과 곤봉으로 주재소 유리창을 파괴하고 또 투석으로 대항하였으며, 어떤 청년들은 주재소 안으로 뛰어 들어가 구금된 애국동지들을 구출하려고 하였다.
의자 책상은 부숴지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일군경들은 군중에게 무자비한 총탄을 퍼부었다.
군중들은 할 수 없이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이 항쟁에서 일 군경 3명[경찰 1인, 헌병 2인]과 조선인 경찰 1명에게 중상을 입히고 애국 군중들 중에는 9의 부상자가 생겼다. 특히 이 가운데 박도백은 전신에 수많은 총탄을 맞았다.
구포시장 의거에서 검거되어 재판에 회부된 주동 인물은 다음과 같이 42명에 달하였다.
김옥겸(金玉兼)·유기호(柳基護)·박덕홍(朴德弘)·유치호(柳致浩)·허희중(許希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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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태(孫晋泰)·이몽석(李夢石)·양대용(梁大溶)·권용학(權龍鶴)·김장학(金章鶴)·윤경(尹涇)·김영길(金永吉)·안화중(安華重)·김달수(金澾洙)·윤정은(尹正殷)·백인봉(白仁鳳)·윤경봉(尹敬奉)·강석이(姜碩伊)·허치옥(許致玉)·변봉엽(邊奉燁)·박용수(朴龍水)·노원필(盧源弼)·윤장수(尹章守)·박영초(朴永初)·도우황(都宇黃)·임봉래(林鳳來)·박도백(朴道伯)·김덕원(金德元)·조해규(趙海奎)·김윤길(金潤吉)·조한봉(趙漢鳳)·유진영(兪鎭榮)·신성집(申性執)·박석오(朴碩五)·김용이(金用伊)·노원길(盧遠吉)·윤대근(尹大根)·강두조(姜斗兆)·진유관(陳有寬)·최종호(催宗鎬)·정태길(鄭泰吉)·허정(許楨)
이들은 모두 부산지방법원에서 예심(豫審)에 회부되어 조사에 오랜 시일을 끌어 이들의 고초는 말할 수 없었거니와 이 가운데서 유진영(兪鎭榮)·최종호(催宗鎬)·노원길(盧遠吉)은 면소(免訴)되고, 최한봉(崔漢鳳)·정태호(鄭泰浩)는 방면되었으나, 나머지는 4개월에서 1년 6개월에 걸친 징역형을 받았다.
이들 주동 인물들은 대부분이 20, 30대의 청년들이었고, 또 사회신분으로는 농민·상인 ·노동자들이었다.
부산(釜山)·동래읍(東萊邑)에서 일어난 의거의 주동체가 주로 학생신분이었고, 또 이들이 대부분 시위운동으로 그친데 대하여 굳센 저항의 위력을 발휘한 이곳 구포시장 의거는 그 주동체가 농민·상인·노동자였다는 것은 이채로운 사실이라 하겠다.6)

 

 

5 높아가는 학생들의 저항의식과 그 항쟁
3월 11일 일신여학교(日新女學校) 여학생들의 용감한 의거는 경남 3·1운동의 효시가 되어 그 항쟁의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였을 뿐 아니라 이 고장 애국항민들의 자주독립의 항일의식을 더 한층 높여갔다.
일신여학교는 3월 11일의 의거로 당국의 지시에 따라 휴교로 들어갔다. 4월 1일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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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김옥겸(金玉兼) 외 41인에 대한 예심(豫審) 판결문, 1919년 7월 16일·부산지방법원·≪고등경찰관계적록(高等警察關係摘錄)≫ 1936년 12월 경상남도 경찰부 po.15·김의환, ≪3·1운동 반세기≫ ≪국제신보≫ 1969년 2월 27일자·김정명(金正明), ≪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 I p.435·437·임봉래(林鳳來), ≪구포사건(龜浦事件)≫ ≪신동아≫ 1969년 3월 호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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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학하였으나 총 학생 수 1백 10명 가운데 등교 학생은 58명에 불과하였다.
이때 검속중이던 교장 데이비스(E.J.Davis)는 옥중에서 이 소식을 듣고 기도에 힘쓰라고 당부하였다.
50여 명의 여학생들은 옥중 학생들의 옥고의 소식을 전해 듣고 일제의 만행에 격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7)
이때 구속된 여학생들은 옥중에서 모시실을 무릎에 비벼 뽑는 강제노동으로 무릎이 벗겨져 피가 나고 또 매일 나체검사를 당하는 등 그 곤욕은 말할 수 없었다.8)
이들의 옥고에 대하여는 박은식(朴殷植)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서도,
“부산항 일신여학교 학도는······(중략)······모두 처녀들이다. 독립운동에 참가하여 구금되어 옥에 들어가 그 참형과 수욕은 말로 다 형용할 수 없었다9).
라고 하여 사실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부산의 애국학생들과 애국 항민들의 분격은 더욱 높아가지 않을 수 없었고, 따라서 항일독립정신은 더욱 앙양되어 갔다.
이리하여 4월 3일에는 학생·항민들이 주동이 된 대대적인 독립 만세시위가 다시 부산진 거리에서 일어났다.
부산진(釜山鎭)공립보통학교 학생 배수원(裵守元) 등은 동교 교사 홍재문(洪在文)과 더불어 모의를 거듭한 후 이곳 기독교도들을 중심으로 하는 수백 명의 항민의 호응을 얻어 궐기하였다.
오후 2시 30분경 이들 주동 인물들은 독립만세(獨立萬歲)라고 대서특필한 플래카드를 좌천동(佐川洞) 거리에 세우고 수백 명의 군중들과 더불어 대한 독립만세를 고창 연호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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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김정명(金正明), ≪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 I . 10P612~613
8) 이들 주동 인물들이 출옥할 때 나체검신의 이야기만은 서로 세상에 나아가 공개하지 않기로 맹약 하였던 것이나 나이 70이 넘은 오늘날이기 때문에 비로소 공개한다고 하면서 당시의 주동인물의 1사람인 송명진(宋明進) 여사가 1971년 3월 1일 ≪국제신보≫사 주최 3·1절 52돌에 되돌아보는 일신여학교 주동 인물들의 좌담에서 필자에게 비로소 폭로해 주었다. 또 이들이 출옥할 때 관계일인들도 이 사실만은 세상에 나아가 이야기하지 않도록 간절히 부탁을 하더라는 것이다.
9) 박은식(朴殷植),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 제1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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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달려온 일군경이 무자비한 탄압을 가하면서 주동 인물을 검거하기 시작하여 주동 인물 10명이 검거되었다.
또한 이때 이들은 이러한 독립시위와 아울러 ≪조선독립신문(朝鮮獨立新聞)≫이라는 애국신문을 발행할 계획을 서둘렀다.
4월 8일에는 일신여학교 여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보다 더 큰 항일 만세시위가 부산진 거리에서 전개되었다.
즉 일신여학교는 4월 1일에 개학하였으나 옥중 은사들과 학생들의 옥고를 전해 듣고 그 분노를 금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4월 8일 오후 8시경 부산진 공립보통학교 김애련(金愛漣)·전호봉(全浩鳳)·이갑이(李甲伊) 등을 주동으로 일신 여학생 약50명과 인근 수백 명의 군중들이 호응하여 좌천동 신도로(新道路)에서 시위가 전개되었다.
이때 달려온 경찰이 행진을 제지하고 주동 인물들을 검거하자 이갑이(李甲伊)는 육박전으로 이들에게 대항하여 검거된 주동 인물을 구출하려고 시도하다가 포악한 경찰들을 당해 낼 수 없어 그도 또한 검거되고 말았다. 이날 의거에는 5명의 주동 인물이 검거되었다.
이곳 의거는 4월 9, 10에도 계획되었다.
즉 부산진 좌천동(佐川洞)에 살고 있던 김태곤(金兌坤)·박성해(朴聖海)·최익수(催益守) 외 16명은 동래고등보통학교 부산상업학교 일신여학교(日新女學校)의 남녀 학생과 항민들을 규합하여 4, 9일 10일 양일간에 걸쳐 좌천동에서 대대적인 만세시위를 전개하려고 모의하다가 일경에 탐지되어 피검되고 말았던 것이다. 실로 애석한 노릇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후 영도(影島)에서는 부산상업학교를 나온 이남식(李南植)이 영도의 사립옥성학교(玉成學校) 교사 정인찬(鄭寅贊)의 지도를 받아 옥성학교 학생 신기홍(辛基洪)·장용술(張龍術)·허택윤(許澤潤) 등과 더불어 옥성 학교 뒤편 송림 사이에서 대한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시내로 행진하려다가 일경에 검거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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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의거를 지도한 정인찬(鄭寅贊)은 그 후 상해임시정부의 지령에 대라 임시정부 경남 간부(慶南幹部) 및 간사장(幹事長)의 직책으로 안희제(安熙濟)·윤현태(尹顯泰)등과 손을 잡고 부산을 무대로 김해(金海)·밀양(密陽)·양산(梁山) 일대에 걸쳐 군자금 모집에 종사하다가 일경에 검거되어 1929년 2월 18일 출판법 위반(出版法違反) 죄명으로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언도받아 고된 옥고를 치루었다.[옥고의 여독으로 그는 1932년 7월에 세상을 떠났다.]
부산지방의 3·1항쟁은 비록 그 운동의 형태는 약간 다르나 4월 하순까지도 그대로 계속 되었다.
즉 4월 27일 오후 4시경에는 부산진역(釜山鎭驛) 남방 약 1백 미터 지점인 영가대(永嘉臺) 부근 철도 가에서 조선인 청년 약 30명이 부산을 향하여 달려오는 여차에 투석세례를 가하여 유리창을 파괴하고 같은 날 오후 7시 25분 서면(西面) 당감동(堂甘洞) 제1철교 건널목 부근에서도 부근을 향해 들어오는 특별 열차에 큰 돌을 투석하여 2등 차창의 2중 유리가 박살난 사실이 있었다.10)
이외 노동자들의 항쟁으로는 4월 20일 부산의 전차 운전수 50여 명이 항일동맹파업을 단행하고, 5월 16일에는 만철(滿鐵) 관리국(管理局) 철도공장(鐵道工場) 초량분공장(草梁分工場)의 조선인 직공 2백여 명이 역시 항일 독립파업을 단행하여 그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11)
이상 일신여학교·동래 고보·범어사 학생들의 의거의 뒤를 이어 일어난 그 후의 2,3,4차의 항일의거와 노동자들의 투쟁을 통하여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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