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축구의 큰 산’ 김호(40회) 감독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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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축구의 큰 산’ 김호(40회) 감독을 만나다

2,973 천용호66 2012.09.10 09:46

‘한국 축구의 큰 산’ 김호 감독을 만나다

“기적은 그냥 일어나는 게 아니다”
“수원 시절, 여전히 잊지 못해”
“고향서 아이들 가르치는 지금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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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회의 가슴팍 도사]
한국 축구계의 ‘핫’하고 ‘쿨’한 인물들을 직접 만나 진솔한 이야기를 끌어내는 포포투의 ‘가슴팍 도사’ 김현회가 ‘한국 축구의 큰 산’ 김호 감독을 인터뷰했다. 축구팬들이 궁금해하는 이가 있다면 어디든 마다치 않고 달려가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가슴팍 도사’ 김현회와 함께 김호 감독을 샅샅이 파헤쳐 보자. 팍팍!

이름 김호. 올해 나이 예순 아홉. 1964년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단 그는 1970년대 아시아 최고 수비수로 이름을 날리게 됩니다. 선수 시절 못지않게 지도자로서도 화려한 시기를 보냈죠. ‘도하의 기적’을 일으키며 극적으로 진출한 1994년 미국월드컵에서 스페인, 독일 등 유럽 강호들과 대등하게 싸우며 감동을 선사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명장은 히딩크! 그 히딩크도 이루지 못한 업적을 K리그에서 이뤘는데요. 1995년 수원 창단 감독으로 부임해 2003년 지휘봉을 내려놓을 때까지 정규리그 우승 2회, FA컵 우승 1회, 아시아챔피언십 우승 2회, 그리고 1999년 전무후무한 프로축구 전관왕 달성 등 숱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감독님 안녕하세요. 축구장에서만 뵙다가 이곳 통영에서 감독님을 뵙게 되니 참 기분이 새롭네요.
김호 허허, 뭐 늙은이 만난다고 이리 멀리까지 왔노. 요새 젊은 친구들 기사 쓸 것도 많을 텐데 이 늙은이가 해줄 말이 뭐가 있다고.

-아닙니다. 요새 감독님이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해 하는 젊은 친구들이 무척 많아요.
김호 나야 고향에서 재미있게 살고 있지. 손주 같은 녀석들한테 축구도 가르치고 친구들 만나서 소주도 한잔하고 즐겁게 살아.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이곳이 친구들하고 어릴 적에 뛰어 놀던 곳이었는데 나이 먹고 여기 다시 돌아오니 참 기분이 좋더라고.

-어릴 적 이야기 좀 해주세요. 여기서 뭐하고 노셨어요.
김호 다마치기 하고 연날리기 하고 공 차고 그랬지. 매일 그렇게 놀았어. 난 집이 아주 부유해서  고생 없이 자랐거든. 1940년대에 오토바이 가진 집이 얼마나 있었겠어. 그런데 우리 아버지는 오토바이 타고 엽총 들고 사냥하러 다녔어. 그때는 돈을 은행에 맡기는 게 아니라 집에 모셔두고 그랬는데, 집 벽장 가득히 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지. 몰래 한 번씩 빼서 연 사는데 쓰고 그랬어. 우리 집뿐 아니라 여기 사람들이 부자가 무척 많았어. 6.25 전쟁 때는 어린 나이에 멋 부린다고 방망이 모양으로 된 소련제 수류탄 차고 다니고 그랬어. 어느 날 학교에 친구가 안 나오면 그 놈은 전날 죽은 거야. 어린 애들이 뭘 아나. 기관총 탄피 메고 다니면서 칼싸움했어. 요새 어린 애들은 장난감 총 들고 싸우는데 우리는 진짜 무기 들고 싸웠지. 허허.

-축구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김호 우리 집에 귀한 ‘제니스 라디오’가 있었다고. 그런데 어느 날 라디오로 축구 중계를 들었어. 대회 이름은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나는데 한국이 결승전에서 자유중국(대만)한테 3-1로 지는 경기였지. 홍콩에 세미프로리그가 있어 무척 강했는데 걔네들이 자유중국 국적으로 대회에 나온 거야. 한국에 최정민, 차태성 등 쟁쟁한 선수들이 나갔는데도 지는 걸 보고 ‘아, 내가 축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 내가 육상도 잘하고 운동 신경이 좀 있었거든. 그래서 4학년 때 두룡초등학교 축구부에 들어가서 본격적으로 축구를 시작했지. 그때는 공격수로 결승골도 넣고 그랬다니까.

-그러다가 부산으로 축구 유학을 떠나신 걸로 알고 있어요. 요새로 치면 빅리그에 진출한 셈이네요.
김호 통영에서 계속 축구를 하고 싶었는데 통영고등학교 축구부가 없어져서 어쩔 수 없이 부산동래고등학교로 전학을 간 거지. 외지에서 생활하는 게 힘들었지만 선생님이 참 좋으셔서 축구를 열심히 할 수 있었어. 지금 프로축구연맹 안기헌 사무총장 아버지인 안종수 선생님이라고, 1948년 런던올림픽까지 다녀오셨던 분이 내 스승님이야. 원래는 공격만 했는데 그 분이 수비도 시켰어. 우리가 이기고 있으면 수비하고 지고 있으면 공격하고 미드필더 빼고는 다 했던 거 같아.

-원조 ‘멀티 플레이어’네요. 그런데 축구를 잘했으면 당연히 고려대나 연세대에 가야 하는 거 아닌가요. 감독님은 대학교에 가지 않으셨는데 안 간 건가요, 못 간 건가요.
김호 능력이 없어서 못 갔나봐. 그냥 ‘대학은 가서 뭐하나. 축구나 열심히 하자’라는 생각도 강했어. 존경하는 선생님이 제일모직 감독으로 가시면서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그 팀으로 따라갔어. 나이는 어렸는데 선생님이 추천해 주셔서 기회가 생겼지. 당시 제일모직에 대표 선수만 15명이 있었는데 내가 선발로 뛰었다니까. 나는 여자친구하고 연애도 제대로 못 해봤어. 연대와 고대를 이기려면 오로지 운동장에서 이기는 것밖에 없었거든. ‘내가 뛰어나게 잘하면 날 뽑을 거다’라고 생각했어. 설날에 집에도 안 가고 축구만 할 정도였지. 지금 생각하면 그 시절을 즐기지 못한 게 좀 서글퍼. 이후 10년 동안 연대와 고대에서 “졸업장 줄 테니 오라”고 했는데 안 갔어. 선수 생활 내내 연·고대가 나를 괴롭히니까 더 가기 싫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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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대표선수가 됐으니 대학에 안 가고도 성공한 셈이네요.
김호 그렇다고 볼 수 있지. 나는 사실 청소년 대표도 한 번 해본 적 없어. 다 떨어졌거든. 당시에는 워낙 나이를 속이거나 유급한 애들이 많아서 청소년 경기 하는 데도 다리털이 수북한 아저씨들이 같이 뛰고 그랬거든. 그런데 1965년에 한·중·일 친선경기를 앞두고 처음 국가대표팀에 뽑혔지. 그때는 효창구장에서 대표선수 3차 선발전까지 치러서 선수를 뽑았어. 그래서 1966년 메르데카배에서 화려하게 데뷔했는데 말레이시아와의 첫 경기에서는 어떻게 뛰었는지 기억도 안나. 첫 야간 경기여서 공이 얼마나 빠르게 느껴지던지…. 거기다가 긴장을 해서 5분 뛴 거 같은데 전반전 45분이 지났더라니까.

-지도자 생활에 대해서도 이야기 해주세요.
김호 제일모직에서 뛰다가 해병대에 간 뒤 상업은행, 포항체절을 끝으로 34살에 은퇴했어. 중학교 시절 지도자가 없어서 우리끼리 공 차면서 훈련도 제대로 못하고, 못 배울 때 다짐한 게 있었어. ‘나중에 선수로 성공하고 은퇴한 뒤에 모교에 돌아와 아이들을 가르치자.’ 그래서 내가 졸업한 동래고등학교 코치를 시작했지. 나 자신과의 오랜 약속이었어.

-우승은 많이 하셨나요.
김호 나는 우승보다 대표선수를 많이 배출하는 게 목표였어. 이 대표선수들이 또 훌륭한 지도자가 돼 한국 축구를 이끌어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애들에게 무척 엄하게 대했지. 동래고에 6년 동안 있으면서 대표 선수를 12명 배출했는데 윤성효, 최덕주, 정용환, 김경호 등이 그때 내 제자들이야. 그리고는 한일은행 감독으로 스카우트됐어. 13년 동안 우승을 한 번도 못했는데 꼭 우승을 좀 시켜달라고 하기에 달려갔지.

-한일은행의 부탁은 들어주셨나요.
김호 그럼. 13년 동안 우승 못한 한일은행을 6년 동안 9번이나 우승시켰어. 매년 우승컵을 들어 올렸지. 그리고 프로축구가 출범된 뒤에 현대에 갔어. 김종부 스카우트 파동으로 이미지가 실추된 현대가 나를 감독으로 선임하면서 새롭게 출발하고 싶어 했어. 그래서 현대를 선택했는데 결국 1988년 준우승에 머물렀어. 당시 우승 팀 감독이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 사령탑을 맡기로 이야기가 돼 있었는데 내가 대표팀 감독이 되는 걸 막으려는 사람들이 우리 팀을 꽤 못살게 굴었지.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대표팀을 감독님이 맡았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 궁금해지네요. 워낙 1994년 미국월드컵에서의 선전이 강렬한 인상을 남겼잖아요.
김호 월드컵 본선에 가기 전부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고 하는 게 더 맞지 않겠어. 허허.

-그렇죠. ‘도하의 기적’을 빼놓을 수 없죠.
김호 일본 녀석들이 예선전부터 머리를 참 많이 썼어. 이전에 아시아선수권을 일본에서 했는데 이란이 일본전에서 심판 판정에 항의하다가 4명이나 1년 정지라는 중징계를 당했거든. 그래서 이란이 월드컵 예선에서 일본에 독을 품고 있었어. 우리와 일본, 북한이 손을 잡으면 우리한테 유리하게 싱가포르 쪽에서 최종예선이 열릴 수도 있었는데 일본이 이란을 견제한다고 사우디아라비아하고 손을 잡고 카타르 도하를 고집했어. 이란은 중동 다른 나라에도 적이거든. 거기에다가 우리는 일정도 좋지 않았어. 이란과 이라크, 사우디아가 현실적으로 가장 강했는데 이 세 팀을 내리 상대해야 했거든. 이 첫 3경기에서 2승1무를 하고 그 후에 일본, 북한 중에 한 팀을 잡자는 게 내 생각이었지.

-하지만 첫 3경기에서 목표를 이루지 못했어요.
김호 2승1무를 하고 싶었는데 1승2무를 했지. 첫 경기에서 이란을 3-0으로 크게 이긴 다음 이라크전에서 2-2로 비겼어. 그리고 3차전에서 사우디랑 붙었는데 1-0으로 이기고 있던 중에 심판이 글쎄 추가시간을 7분이나 주는 거야. 그래서 결국 막판에 동점골을 허용하고 1-1로 비겼지. 계획이 틀어진 거야. 그러고 나서 일본을 만났는데 당시 우리는 베테랑들이 다 은퇴하고 신인들뿐이었거든. 아직 익지 않은 선수들이었어. 일본한테 0-1로 지고 말았지. 마지막 경기는 북한전이었어. 우린 일단 북한을 2-0 이상으로 이기고 다른 결과를 지켜봐야 하는데 우리가 이전까지 북한에 2골차로 이겨본 적이 없었거든. 그런데 양 사이드 선수가 경고누적으로 나오지 못해 거길 물고 늘어졌지.

-결국 우리가 북한을 3-0으로 이기고 일본은 이라크와 2-2로 비기면서 극적으로 월드컵 본선에 갈 수 있었는데 당시 심정은 어땠나요.
김호 기적이라는 건 그냥 일어나는 게 아니야. 내가 열심히 안 해놓고 기적을 바랄 수는 없지. 나는 일단 우리 경기에 최선을 다하고 그 다음은 운명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어. 우리가 교민들한테 경기 끝나고 제대로 인사를 한 적이 없었거든. 추가시간에 골 먹고 비기고 일본한테는 졌으니 웃으면서 인사를 할 수가 없었어. 그런데 북한전 끝나고 교민들한테 인사를 하러 가는데 ‘본선 진출에 실패했으니 이제 한국 돌아가면 축구계를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때 무전기에서 긴박하게 일본-이라크전 결과가 들려왔어. “투투”하는 거야. 2-2로 비겼다는 소리지. 뭐 그냥 난리가 났어. 기적은 정말 우리가 열심히 하면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했어. 끝나는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으면 뭔가 일어나더라고. 도하에 달이 둥실 떠 있는데 그걸 보면서 눈물을 흘릴 뻔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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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선에 나가서는 좋은 경기력을 선보였지만 아쉽게도 16강 진출에는 실패했어요.
김호 사실 우리가 우승하러 간 건 아니잖아. 아시아도 어느 정도 위치에 올랐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 스페인하고 독일 상대로 참 아쉬운 경기를 했는데 우리가 기능은 괜찮았지만 워낙 큰 경기 경험이 없어서 운영이 잘 안 되는 거야. 그거 때문에 고민이 많았지. 아마 시간을 돌린다면 윤성효를 월드컵에 데리고 갔을 것 같아. 그 친구가 참 패스도 잘하고 수비력도 있고 노련했거든. 걔를 뽑고 싶었는데 내 제자라서 말이 나올까봐 안 뽑았지. 그게 참 아쉬워. 그리고 대회 마치고 한국 돌아왔는데 협회에서 돈 200만원 주고 공항에서 그냥 선수단을 해산시켰어. 고생도 많이 했는데 그냥 그렇게 흩어진 게 미안하지. 내가 죽기 전에 그 애들한테 식사 한 번 대접하고 싶어.

-월드컵에서는 아쉬움을 남겼지만 K리그에서는 영광을 이뤘잖아요. 지금도 감독님의 수원 시절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김호 나도 수원 시절은 잊지 못해. 내가 수원 감독을 그만두더라도 고문이라던지 어떤 역할을 맡아 남아 있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아. 지금 수원 경기장에 잘 안 가는 이유가 서포터가 나를 너무 좋아하고 그리워하니까 그게 마음 아파서야.

-수원 시절 ‘고데로 트리오’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무척 많습니다.
김호 데니스는 괴팍한 성격이지만 그래도 개구쟁이였고 귀여운 면도 많았어. 그리고 산드로는 다들 축구를 너무 못한다고 방출시키라고 한 걸 내가 3개월만 더 데리고 있자고 했지. 이왕 뽑았는데 적응 시간도 필요하고 좀 오래보고 싶었어. 그때 산드로가 18살이었거든. 참 좋은 선수였어. 그런데 요새 이야기를 들어보니 참 많이 망가졌더라고. 지금 전북에서 뛰는 에닝요도 내가 18살 때 수원으로 데리고 왔던 선수야. 나드손은 성격이 좀 ‘망나니’였어. 허허.

-또 기억나는 외국인 선수가 있나요.
김호 바데아가 참 기억에 남아. 초창기 때 그 친구가 너무 열심히 해줘서 수원의 정신을 만들어 줬어. 내가 너무 고마워서 일찌감치 J리그로 보내 먹고 살도록 했어. 돈 많이 벌어서 행복하게 살라고 말이야. 내가 몇 년 전에 루마니아에 갔는데 바데아가 그 먼 길을 차타고 와서 밥을 대접하더라고. 보고 싶었대. 올리는 덩치에 비해서 좀 많이 가벼웠어. 이야기하니 좋았던 그때가 떠오르네.

-2009년을 끝으로 대전 감독직에서 물러나며 K리그를 떠나셨는데 아쉽지는 않나요.
김호 가끔 다시 돌아가고 싶을 때도 있어. K리그 구단에서 구체적인 제의가 온다면 생각해 볼 마음도 있고. 그런데 지금은 고향에서 아이들 가르치는 게 즐거워. 순진하고 천진난만한 아이들을 보면 참 행복해. 기술을 가르쳐 주면 그걸 해보려고 하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

-지금 감독님의 고민은 뭔가요.
김호 글쎄.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언행에 제약이 많잖아. 아무래도 품위를 유지해야 하는데 그게 제일 어려워. 그리고 가장 고민이자 슬픈 일은 친구들이 죽을 때야.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잖아. 친구들 장례식에 가는 게 싫어. 가슴이 아프고 이상하게 마음이 답답해지거든. 좋은 친구들이 자꾸 멀리 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게 가장 큰 고민이야.

-마지막 질문입니다. 앞으로의 꿈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김호 한국 축구가 더 재미있어지고 잘 됐으면 좋겠어. 내가 했던 거니까. 내가 사랑하고 좋아했던 거니까.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뭐 있겠어. 건강하게 살면서 친구들하고 재미있게 지내는 거지. 예전에 다마치기 하던 친구들하고 이제는 동네에서 소주도 한잔하고 가고 싶은 곳도 마음껏 가고 그러면 행복하지 않겠나. 별 거 없어.

[포포투]
글 = 김현회, 사진 = 이완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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