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책으로 모교를 빛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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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으로 모교를 빛내겠습니다

2,400 38선맨44 2012.09.21 08:43
 
삼년 동안의 중학교 생활, 우리는 1965년 이월 정든 학교, 정든 친구를 뒤로 한 채 눈물 지으며 교문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당시 고향에는 실업계 한 곳, 인문계 한 곳, 이렇게 고등학교가 두 곳이 있었다. 나는 고향에 있는 학교에 진학할 생각이 없었다. 학교성적도 상위권이었고, 또 집 부근에 있는 친구 두 명이 나를 찾아와서 진학에 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 우리 셋은 부산 동래고등학교에 함께 진학하기로 결정했다. 인생에 있어 중요한 의논이었다.
다행히 응시 결과 모두 합격의 영예를 안았다 이 학교는 1898년에 천세기운天勢氣運의 땅, 동래에 민족학교로서 동래부학교로 처음 문을 열었다. 조선왕조의 국운이 기울어가는 시기에 동래기영회의 선각先覺 유지들의, “내일의 동량棟梁을 키워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에서 이 학교의 1백년사는 시작되었던 것이다.
120년이 넘는 성상星霜에 빛나는 모교의 역사는 조선시대를 거쳐 한일합방을 통한 일제강점, 8․15광복, 6․25전쟁, 5․16군사 쿠데타, 연속된 군사정권, 문민정부, 경제식민통치인 IMF시대 등을 겪어온 한국근대사와 함께 호흡하기도 했다.
한 세기가 넘는 역사적 의미의 민족학교로서 이어온 항일의 역사, 불의와 부패에 타협하지 않는 정의의 역사, 금정산 망월대의 호연지기를 품는 조국의 아들, 배달혼의 계승자인 내일의 일꾼, 그 역사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모교는 역사와 전통이 오래된 명문이었으며, 나는 지금도 이 학교를 졸업한 것을 내 일생에 가장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다.
우람히 구비쳐 온 아세아의 거창한 얼이
여기 장산 기름진 들판 그 염원을 이루었나니
갸륵할손 어진 겨레의 슬기 받아 일어선 자 동고는
정의와 인도의 횃불 우렁차게 솟구쳐 올랐네
망월대 위에 걸린 하늘 휘영청 푸르고
사나이의 벅찬 뜻은 멀고도 높거니
동고 동고 거룩하다 그 이름
동고 동고 빛나리라 영원히
1965년 우리는 힘찬 교가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입학식을 거행했다. 그 해는 김기수가 이탈리아의 벤베누리를 다운시키고 미들급 세계선수권을 획득하여 온 국민들의 권투열풍으로 나라가 떠들썩할 때였다. 입학을 하고 보니 예기치 못한 문제가 하나 생겼는데, 그 당시 우리 가정형편으로 하숙을 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래서 나는 친구 몇 명과 함께 울산에서 동래까지 동해남부선 열차로 통학을 하기로 하였다.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새벽 네 시에 기상하여 다섯 시까지 울산역에 도착, 동래역에 일곱시에 도착해야 하는데, 그 열차는 자주 연착을 하는 바람에 나는 첫교시에 여러 번 지각을 했지만 열차로 통학을 하는 동안 많은 추억을 만들기도 했다. 여름방학을 마칠 즈음에야 할머니께서 온천장에 하숙을 허락하셨다. 그때 나는 할머니께서 내 하숙비를 마련하려고 집을 파신 줄도 모르고 좋아라 했으니 얼마나 내가 소갈머리가 없었던가. 집을 처분하신 후 할머니께서는 변두리로 이사를 하셨다. 온천장에서 나는 고향선배들과 함께 일년 가까이 하숙을 하는 동안 정신적인 안정이 되었던지 학교성적도 많이 향상되고 여유시간도 가질 수 있었다.
그 하숙집 주인 아주머니는 아들 한 명을 두고 계셨는데 남편은 잘 보이지 않았다. 간혹 오던 그 남편은 그 하숙집 주인보다 나이가 다소 들어보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아주머니는 그 남자의 작은 부인이었다.
하숙집 식모는 다소 뚱뚱한 남해南海 여자로 당시 미혼이었다.
비대한 체구, 어울리지 않는 복장, 못생긴 용모로 인해 선배들과 나는 별로 관심없이 지냈는데, 그때 그녀의 심정이 어떠했으랴. 우리가 잘해 줄걸. 후회스럽다.
그러나 그녀는 동생 같은 우리에게 반찬이며, 빨래며 잘 챙겨 주었다. 그 후 그녀는 그해 가을에 고향에서 혼인한다면서 우리 곁을 떠났다. 지금은 어디서 무얼하고 지내는지…….
일학년 여름이었다. 6월 22일 박정권은 도쿄에서 한일협정을 조인하였고, 이어 민주당의원 총회에서는 연일 굴욕적인 한일협정비준을 반대하는 농성이 계속되어 그해 여름은 나라가 온통 시끄러웠다. 자연히 우리 학교에서도 이 굴욕적인 한일협정을 반대하는 선배들의 주장으로 재학생 전원이 수업을 거부하고 운동장에서 결의를 한 뒤 철조망이 있는 도로 쪽으로 일제히 나서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들을 진압하려고 완전무장한 많은 경찰들이 도로에서 뒤를 쫓아오고 있는 게 아닌가. 한 팀은 서면까지, 한 팀은 거제까지, 그리고 한 팀은 정화여고 입구까지 흩어져 얼마 안 있어 여기저기서 구타당하고 경찰서로 연행되어 가는 학생들의 수는 헤아릴 수가 없었다. 나도 그때 마구 뛰어가다가 어느 골목길에서 다른 학생들과 함께 경찰서로 연행되어 갔는데 덜컥 겁부터 났다. 많은 학생들이 그날 동래경찰서 마당을 메웠다. 담당과장으로부터 학생들로서의 의무 등 일장 훈계를 듣고 우리는 앞으로는 데모를 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쓴 후 대부분 훈방조치되었다.
나라가 어려울 때 학생들의 봉기는 그 뜻이 순수했으며, 정부와 여당에 일대 타격을 주기도 했지만 한일협정비준은 그대로 국회를 통과하고 말았다.
그 일로 인하여 학교에서도 당분간 휴학을 하게 되었다. 나는 집에 와서 데모에 가담한 일과 경찰에게 곤봉으로 옆구리를 맞았다는 이야기를 할머니께 말씀 드렸더니 할머니의 표정이 금방 어두워지시는게 아닌가. 나는 속으로 ‘괜히 할머니께 말씀 드렸구나.’ 하면서 후회했지만 별일 없이 그냥 지나갔다.
나의 고등학교 성적은 상위권이었으며, 심지어 3학년 1학기 때에는 전교생 360명 가운데 10등 안에 들어갈 정도로 성적이 우수했다. 나는 매일 새벽 4시경에 기상하여 공부하고, 수업을 마친 후에는 밤 12시까지 책상을 떠날 줄 모를 정도로 오로지 학업에 정진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가 아마 내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공부 한 시기, 다시 말해 성적의 황금시대라고 하겠다.
그러나 그 무렵 서서히 나에게 어두운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온 몸에서 식은땀이 나고 기운이 없고 항상 피로감에 젖어 들었으니 바로 폐결핵 증상이었다.
그 소식을 듣고 낙심하시던 할머니의 눈길, 휴학계 제출, 친구들과의 이별, 나의 투병생활…….
1968년은 분명히 내 생애 최초이자 최대의 시련기였다. 집에서 투병생활을 하는 동안 할머니의 간병은 눈물겨웠다. 그 병에는 보신탕이 효과적이라는 이야기를 들으셨던 할머니. 그때 중앙시장 뒷골목에서 보신탕만 십수년 동안 장사하신 친구의 아버지가 계셨다. 그분께서는 오랜 경험으로 음식을 하셨기 때문에 항상 가게에는 많은 식도락가들이 붐볐으며 국물의 구수한 냄새가 특히 별미였다. 할머니는 그 친구 부모님을 잘 알고 계셨다. 그곳에 가셔서 냄비에 보신탕을 사 가지고 오셨는데 나는 처음에는 보신탕을 먹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다소 속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약이라는 생각과 꼭 먹어야 된다는 할머니의 말씀을 듣고 나서야 억지로 먹었다. 생각보다 먹기 좋았고, 몇 번 먹어 보니 구미가 당기기까지 했다. 예나 지금이나 몸이 쇠할 때는 보신탕이 최고가 아닌가. 내가 맛있게 보신탕을 먹기 시작하자 할머니는 하루걸러 그것을 사오셨고 나의 건강은 하루가 다르게 좋아졌다.그리고 나는 그때부터 아침 일찍 일어나 집 뒤에 있는 백양사까지 산책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지금도 아침운동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나는 휴학기간을 이용해 철저한 건강관리는 물론 수많은 문학 서적을 탐독하기도 하였다. 독서는 정신을 풍부하게 만들어 주었고 나의 중요한 일과가 되었다.할머니의 자상하신 간병, 건강관리에 노력한 나. 내가 이듬해 복학을 할 그 시기에 건강은 완전히 회복되었고, 할머니의 얼굴에 그제서야 안도의 빛이 역력했다.그러나 학교성적은 점점 떨어졌고 나도 여러 가지 정황을 검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대학 진학을 포기한 채 고등학교 생활 삼년, 아니 사년의 생활을 우울하게 졸업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69년 박정희 대통령이 대국민담화 「싸우며 건설하는 해」의 신년사가 라디오에서 울려 나올 때였다.그러나, 고등학교 생활은 나의 내면을 퍽 성숙하게 만든 시기였다고 생각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나는 곧 고향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서울에 와서 계속 직장생활을 하면서 대학교 진학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그러나 나의 마음속에서는 항상 대학교를 꿈꾸고 있었던 것 같다.
드디어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모려 21년이 지난 1991년. 나는 서울에서 용감하게 명지전문대학 부동산학과에 응시하여 영예의 합격을 했다.
그때 내 나이 42세로서 만학이었다.입학금과 매학기 등록금은 유자녀로서 국가보훈처에서 교육보호 대상자로 면제되었고, 나는 교과서 대금만 납부하였다.같은 학과 동기들은 대부분 딸 또래였고 내 나이쯤 되는 사람들도 서너 명 있었다.
둔촌동에서 그곳 남가좌동까지 어려운 통학, 수업을 마치고 개포동 집에까지 오는 그 혼신의 노력…….
육필수기집 '나는 호로자식이 아니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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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님 안녕하세요
 
반드시 이 책 한 권으로 모교의 명예를 빛낼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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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유대지
sps38@hanmail.net 다음카페, 나는 호로자식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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