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호로자식이 아니야.수기집 중에서(내 마음의 문을 열면서)

자유게시판

홈 > 커뮤니티 > 자유게시판

자유게시판

나는호로자식이 아니야.수기집 중에서(내 마음의 문을 열면서)

2,434 유대지44 2012.11.30 11:55

내 마음의 문을 열면서

동서고금東西古今을 통하여 비참한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이 있다. 첫째, 늙은 홀아비, 둘째, 늙은 홀어미, 셋째, 부모 없는 아이, 넷째, 자식 없는 늙은이, 바로 사궁四窮이 그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네 가지 가운데 한 가지도 거치지 않고 태어나 다복하게 살아가건만, 어찌하여 할머니와 나는 처음부터 이렇게 인생의 멍에를 등에 지고 허우적대며 시작해야만 했을까. 이것은 바로 할머니와 나의 숙명적인, 그리고 비극적인 인생의 시작을 알려 주는 적신호였다.

『논어』 「학이편學而編」에 이르기를, “아버지가 살아계실 동안은 그 뜻을 살펴볼 것이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는 그 행한 바를 살펴볼 것이니, 3년 동안은 아버지가 행하신 바 도리를 고치지 않아야 효자라고 말할 수 있다” 고 했다.

그런데 나는 나를 낳아 주신 아버지의 얼굴도 본 적이 없고, 그 넓은 가슴에 한 번 안겨 보지도 못했다. 그리고 아버지라고 불러도 못했으며, 그 목소리도 들어 보지도 못했다.

이처럼 아버지의 존재는 내가 태어날 때부터 나에게는 전혀 손길이 닿지 않는 저 먼 세계로 인식되어 왔으므로 나는 아버지를 모시고 싶어도 그것을 행할 수 없으니 참으로 나의 인생은 기구한 운명이 아니고 무엇인가.

내가 어머니의 뱃속에서 만 일 개월도 채 되지 않았던 그때, 어머니 자신도 임신한 사실조차도 몰랐던 그때, 전쟁으로 인하여 아버지는 나라와 겨레를 위해 순국하셨다.

나는 바로 유복자遺腹子, 삼대독자, 대한민국 6·25 전몰군경 유자녀遺子女,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던 저 비극의 호로자식이다.

어릴 때의 일들이 새삼스럽게 생각난다.

그 해 한여름 깊은 밤이었던가. 마당 한가운데 모닥불에서는 모기와 하루살이를 쫓기 위해 옥수수 껍질을 태운 흰 연기 꼬리가 이리저리 흔들거리고, 파란 모기장 안에서는 어느새 들어왔는지 모기 두 마리가 앵앵거리며 잠자리의 어린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내가 분명히 깊은 잠에 빠져들었으리라고 생각한 할머니는 부채를 흔드시고 과일을 드시면서 평상에 앉아 동네 아낙네 서너명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계셨다.

그런데 그때 내 귀를 강하게 때리는 엄청난 이야기들이 아주 조용하게, 그리고 은밀하게 할머니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고 있었다. 바로 나의 가문과 아버지, 그리고 나에 대한 슬프디 슬픈 사연들이······.

나는 잠결에 단순히 그렇게 생각하며 그날 밤 잠이 들었다.

그러나 그후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그날 밤 할머니의 그 이야기들이 한줄기 섬광이 되어 나의 뇌리에 닿았을 때 나는 초겨울 강가로 달려가서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강둑에 혼자 웅크린 채 앉아 얼마나 흐느꼈던가.

할머니는 아마 손자가 아버지가 안 계신 것을 몹시 상심할까 봐 평소 나의 뿌리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시지 않았으리라.

1949년 그 해 봄은 민족 최대의 비극인 6·25동란 발발을 한 해 앞둔 시기로서 좌익과 우익의 사상싸움이 그 어느 해보다도 치열했으며, 그만큼 국내 치안도 극도로 어지러웠다.

그때 나의 아버지는 대한민국 건국의 경찰로서 경상북도경찰국 경주경찰서 안강지서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 해 3월 23일, 미명의 그 시간. 경상북도 경주군 안강읍安康邑 두류리, 인적이 드문 산골 어느 허름한 오두막집에서 일어났던 그 비극의 전투. 경찰관 3명과 북한 인민군 소속 빨치산 부대원 20명과의 너무나 운명적인 두류리전투!

아버지는 바로 그 전투에서 동료경찰 두 명과 함께 조국의 수호신으로 장렬히 순국하신 당시 27세의 유귀룡劉貴龍 경위였다.

아! 하늘도 땅도 무심하여라. 나는 그해 늦가을에 이 세상에 태어났으니······.

나에 대한 이 비극의 지난 역사를 모두 알았을 때 나의 가슴에는 크나큰 격랑의 파도가 스며들었다.

그후 나는 차차 성장하면서 조국의 수호신으로 산화하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자긍심과 존경심으로 변해 감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평소 나의 가슴에 선친에 대한 그리움이 남달리 쌓이고 쌓였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자수성가自手成家의 길을 걸어가면서 숱한 역경을 할머니와 가족들이 함께 겪었다. 그런 난관에 봉착할 때면 나는 아버지에 대한 진한 그리움을 가지고 색 바랜 사진을 바라보며 마음을 정리한다.

‘아버지! 아버지! 나의 아버지! 보고 싶습니다.

저를 힘껏 껴안아 주세요.’

그러노라면 신앙같은 사고와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강한 위력이 나를 엄습해 온다. 이러한 현상은 아마 아버지가 이 세상에 겨우 남기신 한 점 혈육에 대한 강한 뜻이 담긴 훈계요, 어두운 망망대해茫茫大海 한가운데서 길을 잃어버린 채 표류하고 있는 난파선에게 마치 환한 등대 불빛과도 같은 구원의 이정표가 아닐까. 이렇게 나에게 비춘 그 영롱한 빛은 힘들고 모진 세파를 헤쳐가는 나에게 안정과 희망, 바로 그것이었다.

한 가정과 가문에 아버지가 없는 것은 대문이 없는 것과 같고, 어머니가 없는 것은 방문이 없는 것과 같으며, 그리고 일가친척이 없는 것은 울타리가 없는 것과도 같다.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부터 대문과 울타리가 없었고, 세 살 때는 방문마저 잃어버린 쓰디쓴 비운을 그 누구보다도 일찍이 겪으며 성장했다. 그래서 할머니와 어린 나는 가문을 지키기 위해 거친 찬바람을 막아내야 하는 힘겨운 인생의 길을 걸어야만 되었다.

그후 나는 이십대 초반에 가정을 가짐으로서 방황하던 나의 인생항로에 닻을 내리는 작은 평화를 맛볼 수 있었다. 나는 부모님이 다하지 못한 그 대문과 방문의 역할을 내자와 함께 이루어 내는 것이 부모님께 대한 도리요,나의 성스러운 소임임을 확신한다.

올해는 동족상잔의 6․25 전쟁이 발발한지 도 어느덧 62년이 되는 해이다. 이 전쟁으로 수많은 우리민족의 소중한 영혼과 특히,UN의 결의에 따라 이 땅에서 평화의 피를 흘리신 그 젊은이들.이들은 과연 이 땅에 무엇을 위해 싸우고 그리고 저렇게 잠들고 있는가

그것은 바로 이 한반도에 자유민주주의와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서이다. 그들이 흘린 그 고귀한 피와 희생정신을 우리 국민들은 영원히 잊어서는 안될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전쟁이 끝난지 59년이 된 지금도 이 산하에는 변한게 없다. 삼팔선에서 휴전선으로 남북의 경계선 이름만 바뀌었을 뿐 휴전상태이다.

다시말해 아직도 그 무서운 전쟁의 그림자가 완전히 지워지지않고 우리들 가슴속 깊이 길게 드리우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부부는 지난 1994년 6월, 남과 북이 핵문제로 초긴장의 대치상태에 있을때 동부전선 고성 통일전망대에서 서부전선 경기도 백령도까지 20일간 휴전선 155마일을 도보로 횡단한 후, 지금까지 19년간 79회, 강원도 양양에서 경기도 파주까지 자동차로, 걸어서, 달리며, 자전거로 민족의 비극인 삼팔선을 달리고 있다.

그리고 6․25발발 50년이었던 지난 2000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뉴욕~ 워 싱턴~ 덴버~ 샌프란시스코~LA, 4,000km,13개주를 10일간 자동차로 달리면서 조국의 평화기원을 전세계에 알리기도했다.

왜 우리부부가 이렇게 삼팔선과 휴전선을 달려야만 하는가

왜 나의 인생역정을 이렇게 써야만 하는가

그것은 전쟁이 얼마나 무섭고 가정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세계와국민과 전후세대에게 똑똑히 일깨워 주기 위해서이다.

새 천년을 여는 우리 민족은 반만년 역사를 이어오는 동안 수많은 전쟁속에서 고통을 받았다. 이제 21C에는 이 땅에 영원한 평화가 도래하기를 온 국민들과 진심으로 기원하며 반드시 그렇게 될것이다.

이 땅에 평화를 지키기 위해 포화 속에서 사라져간 수많은 영혼들, 이 땅에 묻쳐있는 평화의 수호신인 UN병사들, 그리고 대한민국 건국의 경찰로서 산화한 고 유귀룡劉貴龍 경위의 영전에 이 책을 바친다.

지난 유월 호국보훈의 달에 국가보훈처 박승춘처장으로부터 모범보훈가족으로서 국무총리 정부포상을 전수받았다. 우리가문에 크나큰 영광이고 나에게도 영예로운 수상으로 우리가족 모두의 가슴속에 오래 간직될 것이다. 최해근회장님, 그리고 내자와 함께 사진을 찍었으며 딸들과 주변으로부터 축하전화를 받기도 했다.

끝으로 저의 에세이 출판에 많은 도움을 주신 프로방스출판사 조현수사장님께 이 자리를 빌어 심심한 사의를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12년 9월 일 새벽

창가에 서서

유 대 지

호로자식胡虜子息

태곳적부터 지금까지 이 지구상에는 수많은 전란戰亂이 계속 이어져 왔으며, 이러한 비극은 지금 이 시간에도 멈추지 않고 있으니 한마디로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전란의 혼돈과 난세의 역사 한가운데서도 반만년 동안 고유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면면히 꽃피워 온 민족도 아마 이 지구상에는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우리 민족 근대사 가운데 삼대전란을 꼽는다면, 조선시대 7년간 왜구와의 지루했던 임진왜란壬辰倭亂, 2년간 청나라와의 치욕적인 병자호란丙子胡亂 그리고 금세기 최대의 동족상잔인 3년간 6·25동란動亂이 아닐까. 이러한 전란을 거치는 동안 우리 민족은 말로써 차마 표현 못할 너무나 큰 고통을 당하였다. 더욱이 우리는 지형학적으로 인접한 북방 이민족과는 오랜 세월동안 항상 대결과 긴장상태에 있었으며, 그들과 우호관계는 그리 길지 않다.

그런데 동방예의지국인 우리나라에 호로자식이란 이 용어가 언제, 어디서, 왜, 어떻게 유입되어 회자膾炙되고 있는지, 그 유래를 밝힌 문헌은 없다. 다만, 역사학적으로, 지형적으로, 끊임없이 북방 이민족과 전란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던 우리 민족 사이에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지 않았나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해 본다.

어원語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 시대상을 알아낼 수 있는 경우가 많다. 그 가운데 바로 이 호로라는 글자도 포함될 것이다. 우리나라 북방에는 많은 이민족이 시대를 따라 명멸했다. 그 가운데 흉노匈奴족이 있었는데, 이들은 B.C. 3세기경부터 몽고지방에 번영하였던 유목민족으로서 차차 성장하여 우리 민족과는 수세기에 걸쳐 피의 역사를 이어왔던 이민족 가운데 하나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 민족은 자신들을 괴롭혀온 북방 이민족을 적대시하는 뜻에서 뙤놈, 오랑캐의 아들, 즉 ‘호로자식’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여기에는 상대방에게 심한 모멸감과 그들을 비하시키기 위한 뜻이 담겨 있다.

결론적으로, 여러가지 정황을 감안해 볼 때, 이 용어는 우리 민족 사이에서 전란 속의 북방 이민족을 통칭하는 말로 구전되어온 전래의 순수한 토속 용어라는 게 옳을 것 같다.

근세에 들어서는 이 말의 뜻이 변질되어, 버릇없이 무례하게 행동하는 남녀노소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고 있는데, 잘못 쓰여 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면, 십대 전후의 연령층 사이에서는 아버지가 없는 이들을 주로 일컫고, 성인들 사이에서는 예의범절이 미흡하거나 타인에게 혐오감을 주는 부류의 사람들에게 적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이민족과의 전란이 끝난 지도 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구태의연한 이런 용어가 우리 사회에 버젓이 그대로 통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 가슴에 조용히 손을 얹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한때 이 용어가 사용되던 그러한 어두운 전란의 시대는 이미 지나간 지 오래되었고, 이 말을 하고, 그리고 듣는 사람 모두가 이민족이 아니라, 바로 한 핏줄을 나눈 배달의 동족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전쟁의 악순환을 의미하는 이 용어는 이제 역사의 유물로 사라져야 된다는 생각이다. 따라서 이 책 제목을 마지막으로 이 땅에서 이 용어가 발붙일 수 없도록 우리 국민 모두가 함께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이러한 발상은 국민정서에도 부합되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 제목을 두고 나름대로 많은 우여곡절과 고뇌의 시간을 가졌다. 너무나 자신을 비하시켰다는 둥, 나의 처지는 이 용어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둥······.

그러나 나는 이 책 출판의 목적이 전쟁 반대의 대명제인 이상 증오의 우리 부부가 함께 삼팔선을 달리면서,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이 제목을 끝까지 지켜나가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이를 받아 준 처와 딸들의 동의, 그리고 주위의 많은 분들의 성원에 고마울 뿐이다.

끝으로 여기서 독자 여러분께 간곡히 밝혀둘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본 글의 호로자식은 어디까지나 작가 개인에게만 국한되는 용어이며, 어떠한 특정인, 어떠한 특정집단이나 단체와는 무관하다는 사실이다.

차 례

호로자식

내 마음의 문을 열면서

중앙시장

울어라 문풍지야

첫날밤을 품다

옛집별곡

천지신명에게 바치는 노래

혼인성사전

초여름날의 사부곡

극장회상

아저씨, 나는 후레자식이 아닙니다

할머니의 새벽 훈육 백가지

술을 배우다

내 사랑 손부

학교생활

조손의 노랫가락

여의도 벤치에 앉아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