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호로자식이 아니야" 수기집중에서(옛집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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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호로자식이 아니야" 수기집중에서(옛집별곡)

2,558 유대지44 2012.11.29 19:45

옛집별곡

  울산광역시 중구 성남동 228번지. 대지 59평, 건평 16평, 정남향 목조와가 단층, 방 3칸, 창고 1칸, 목조 돼지우리, 잘 닫혀지지 않고 항상 삐거덕거리는 목조대문, 채소밭 20평, 흙담장, 북쪽은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목제담장, 남쪽은 사방관리소 목제창고와 길게 경계를 이루고 , 그리고 서쪽은 엉성하게 쳐진 철조망담장, 재래식 화장실, 집 뒤 자갈 하수구, 간장과 된장 냄새가 물씬 풍기는 장독대들, 비가 오면 어김없이 빗물이 질퍽하게 여기저기 고이는 마당······.

  바로 내가 유년기를 보내며 정들었던 집 정경이다. 나는 고등학교 1학년 1학기까지 무려 십육년간이나 이 집에서 생활했고 그곳에서 잔뼈가 굵었으며, 그리움과 슬픔이 서린 그립고 정다운 집이다. 이 집은 신작로에서 다소 들어가 긴 골목길을 끼고 위치해 있어 무엇보다도 교통사고의 위험이 없어 다행이었다. 그리고 초등학교와 중학교도 가까워 통학하기도 수월했으며, 큰길에 나서면 부근에 부산, 경주, 포항행 시외버스 정류장이 있었으며, 남쪽 인근에는 울산소방서와 세무서 등 관공서도 가까웠다.

  특히, 경상남도 산림국 산하 기구인 울산사방관리소 건물이 우리 집 남쪽 담을 끼고 있어 누군가 우리 집 위치를 물으면, 나는 항상 사방관리소 옆이라고 대답해주었고, 상대방도 그 정도로만 얘기해도 금방 알아들었다. 이렇게 우리 집은 시내 한가운데 위치해 있었다.

  우리 집 담을 끼고 있는 그 골목길에서 나는 동네 친구들과 갖가지 놀이를 즐기면서 유년기를 아무 탈 없이 보낼 수 있었다.

그 당시 할머니와 나는 방 한 칸을 사용하였고, 내가 시험기간이라든지 여름철에는 작은방을 간혹 사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칸은 할머니가 임대를 주셨는데, 내 기억으로 십수년이 지날 때까지 세입자가 두 번 밖에 바뀌지 않을 정도로 우리는 그 분들과 좋은 분위기 속에서 허물없이 잘 지냈다.

  그것은 아마도 할머니가 그 분들에게 집주인으로서 부담을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끈끈한 인정으로 그 분들을 대하셨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마당 한가운데는 할머니가 조그만 채소밭을 손수 일구어 동한기를 제외한 일년내내 배추, 상추, 토마토, 고추, 옥수수, 무, 깻잎, 가지, 등 계절따라 작물을 번갈아 심어 부식과 간식 가운데 일부를 자급자족 하였다.

  그리고 수확기가 되면 할머니는 이웃집 아주머니들을 집으로 불러 모아서 여러가지 대화를 나누시면서 그 작물들을 일부 나누어 주셨다. 나는 그때마다 마음속으로 (할매는 씰떼없이 머할라꼬 저래 인심을 쓰는지 모르겠네. 상추는 머할라꼬 저래 주노) 하며 아까워했는데, 그것은 나의 욕심이라고 후에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할머니가 중앙시장에 멸치장사를 하러 간 뒤에는 우리 집은 마치 무주공산같이 온 동네 친구며, 심지어 흰둥이, 검둥이 등 온갖 동네 개들까지도 마당 구석에서 먼지를 날리며 마음껏 뛰어 놀았다. 그 긴 골목길 외에는 가까운 장소에 놀이공간이 없었기 때문에 자연히 우리 집 마당이 그 놀이터를 대신할 정도로 북새통을 이루었던 것이다.

  이러한 심적 부담없는 사례들이 바로 할머니와 내가 이웃 사람들과 더욱 친근하게 지낼 수 있었던 주요한 요인이었음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리고 할머니가 사정이 있어 간혹 시장에 가시지 않거나, 조금 일찍 오시는 날이면 으례히 옆집 아주머니들이 할머니를 에워싸고 마루에 앉아 서로 간식을 즐기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였다. “요즘 손자 학교 성적이 올랐다면서요?” “할머니께서 지금 입고 계시는 옷이 참 잘 어울려요” “글쎄, 건너편 김씨는 어떻게 하려고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에 그만 사표를 냈대요. 그리고 며칠 전부터 방씨는 밤마다 여자를 팬대요. 그래서 그 매에 못 이겨 그 여자가 가출해 버렸는데 자식들이 너무 불쌍해요” “신씨 집에는 며칠 전 온돌을 수리했는데 방이 따뜻하지 않다고 시공업자와 대판 싸워서 코뼈가 그만 부러져 지금 윤 외과에 입원해 있대요, 글쎄”

  이런저런 세상살이의 갖가지 이야기들을 할머니에게 늘어놓는다. 그러면 할머니는 느긋하게 인생의 선배로서 좋은 말씀과 충고를 해주시는 등 해법을 그들에게 제시해 주신다.

  그리고 할머니는 시장에서 들은 많은 이야기들을 그 분들에게 재미있게 들려줌으로써 항상 그 분들과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유지하셨다.

  할머니는 음식 솜씨도 뛰어나셨는데 여러가지 가운데 특히 겨울철의 김장김치와 초봄에 담그는 된장은 그야말로 할머니 조리 솜씨 가운데 으뜸이셨다.

계절 따라 매년 맞이하는 이 두 가지 큰 작업들을 할머니는 재료 구입부터 마무리까지 정성을 다하셨으며 온갖 양념들을 적절하게 배합하여 손수 조리하셨다.

  할머니가 이러한 일들을 다른 누구보다도 월등하게 잘하셨기 때문에 이 시기가 되면 자연스럽게 이웃 아주머니들이 그 비법을 전수받기 위해 우리 집으로 모여들곤 하였다. 하여튼 앞에 열거한 사례 외에도 여러 가지 사연으로 인하여 할머니와 나는 부근 사람들로부터 평판이 좋았다.

  옛날 집 남쪽 모서리 경계 쪽으로 수령樹齡이 꽤 오래되어 굵은 뿌리, 가지와 잎사귀가 무성한 감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매년 가을이 되면 이 감나무에는 먹음직한 큰 홍시가 주렁주렁 매달렸는데, 이때만 되면 혹시나 다른 사람들이 몰래 그 홍시를 따가지 않나 하고 할머니와 나는 자주 감시의 눈길을 돌리곤 했다. 홍시가 무르익으면 할머니와 나는 홍시를 따서 집 뒤 장독에 비축한 뒤 여러 날을 두고 즐겨 먹었는데, 참으로 그 맛이 독특했다. 그리고 할머니는 주위 분들에게 그 홍시를 일부 나누어주기도 했다.

그런데, 그 해 늦은 가을 어느날이라고 기억한다.

  옆집 윤모형사가 우리 집 감나무 가지 일부가 자신이 드나드는 골목길 쪽으로 넘어와서 통행에 불편을 준다는 이유로 할머니에게 사전 이야기 한마디 없이 감나무 밑동을 도끼로 마구 찍으려는 게 아닌가. 마침 집 마루에 앉아있다가 이 광경을 보고 놀란 나는 시장으로 달려가 할머니에게 그 사실을 알렸고, 할머니는 노점을 옆 사람에게 잠시 맡겨둔 채 부랴부랴 나와 함께 집으로 달려오셔서 그 형사와 심하게 다투셨다. 두 사람이 다투는 동안 이웃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그 감나무 부근으로 모여들었으며, 큰소리가 오가고 사태가 잘못 심각하게 전개되어갔다.

  오십대 할머니와 삼십대 젊은 형사와의 대결은 주위 사람들에게 충분히 흥미를 끌만한 사건이었으며, 나는 근심어린 눈으로 이 사태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주시하는 가운데 할머니는 단호하게 형사의 부당한 행동에 항의하며 사태 책임에 대하여 강력히 주장하셨다. 그런 와중에 자신의 부당성을 깨달은 형사는 스스로 사과하며 물러서게 되었다. 다행이 감나무의 도끼 자국 흔적도 대단치 않아 그 해 가을 감나무 사건은 그것으로 일단락되었으며, 할머니도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으셨다.

  이번 사태에 대하여 형사가 부당하다는 주위 여론이 형성된 데에는 평소 할머니와 나에 대한 평판도 한몫 톡톡히 했다고 생각한다.

  그날 사태에 대한 할머니의 대응자세對應姿勢는 단순히 훼손된 감나무 한 그루에 대한 노여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풍전등화의 가문을 외세로부터 수호하시겠다는 강력한 메시지였으며, 그 누구든 자신과 손자, 그리고 가문에 불법부당한 도전을 해올 경우에는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그 누구도 용서치 않겠다는 성전聖戰, 바로 그것이었다.

  가장으로서 손자와 나의 골목 친구, 그리고 많은 동네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논리적인 말로 그 형사를 당당하게 물리친 할머니의 그날 모습은 어린 나의 마음을 든든하게 해주었으며, 감나무 대첩사건大捷事件은 우리 동네 사람들 사이에 오랫동안 회자膾炙되기도 하였다.

  그 당시 7, 8월 장마철이 다가오면 시내 하수구 시설이 부실하여 항상 온 시내와 함께 우리 집도 빗물이 마루까지 차오를 정도로 침수되었다. 그러면 할머니와 나는 겨우 이불 몇 가지와 꼭 필요한 가재도구, 그리고 내 교과서 등을 챙겨서 지대가 높은 먼 친척 집으로 피신해야만 했다. 이렇게 매년 찾아오는 불청객인 홍수로 인하여 할머니와 나는 항상 고초를 겪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옛날 그 집을 잊지 못한다.어릴 때의 내 꿈과 할머니 의 숨결이 살아 숨쉬던 그 옛날 집, 그리고 잊지 못할 갖가지 사연들······. 내가 부산 동래에서 하숙을 하던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집에 오니 할머니는 그 집을 이미 처분하시고 북정동 변두리로 이사하셨다. 아마 할머니는 그 당시 나의 하숙비며, 생활비를 당신께서 혼자 감내하시기에는 너무나 힘에 겨웠으리라. 나는 그날 할머니가 옆집에 맡겨 두신 새집 약도를 손에 쥔 채 할머니가 떠나시고 안 계신 그 집 마루턱에 걸터앉아 깊은 생각에 젖어들었다. ‘내가 비록 지금은 이 집을 떠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다.’

  이렇게 굳은 결심을 한 나는 어둠이 짙어질 무렵 책가방을 들고 정들었던 그 집을 뒤로한 채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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