紀行文 中國 黃山의 蓮華峰에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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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철(40)
2004.10.05 13:01
2002년 8월 11일 토요일
동래고 망월산악회가 주관하는 제5차 해외 등산을 중국의 황산으로 정하여 8월 11일부터 15일까지 4박5일간의 일정으로 장도에 오른다. 아침 8시까지 약국 앞에 집합한다고 하여서 차를 몰고 공항까지 가서 들어가니 벌써 들 와서 기다린다. 차는 아들인 태승이 편에 돌려보내나 잘 갔는지 궁금하여 전화한다. 벌써 군에 갔다와서 차를 끌고 다닌다니 한편으론 대견스럽고 불안한 심정이다.
영남지방에 많은 비가 와서 제방이 무너져 피해가 심하다고 하나 이곳의 강물을 비행기를 타고 내려다보니 황토물이 범람하고 시뻘겋게 하류로 내려가는 게 보인다. 治山治水는 옛날 고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 국가가 관리하고 있으나 하늘의 뜻을 어찌 미물인 인간이 알 수 있으랴...
얼마만큼 올라가 구름 속을 보니 하얀 뭉게구름 위에 새파란 하늘이 보인다. 1시간 후에 도착한 上海의 구름도 하얗다. 역시나 여기도 黃浦江 강물이 누런색을 띠며 내려오는 게 보인다. 강인지 바다인지 광활하게 펼쳐진 모습이 장대하구나. 강의 연변에 있는 비행장은 작년에 새로 건설되어 공항 시설들의 길이가 1km는 되겠다. 비가 추적거리며 내린다. 회원이 110명이나 되니 버스가 4대가 준비되어 따로 편성하여 상해의 중심구인 애만정이란 중국식 식당으로 향한다.
공항에서 들어가면서 보니 중국이란 나라는 ‘가히 알고도 모르는 게 많은 곳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좌우로 늘어선 빌딩의 숲은 하나도 같은 건물은 없고 최신식 빌딩으로 건설되어 지금도 건설중인 건물이 많다. 지금의 중국은 우리가 말하는 60년대의 조국근대화 수준을 벌써 지나갔다는 것이 실감으로 다가온다. 도시는 잘 개발되고 있으나 농촌은 아직도 우리 60년대를 상기시키고 있다.
버스에 올라온 가이드의 퀴즈 문제는 ‘과연 중국의 인구는 몇이나 될런지요?’ 란 질문이었다. 13~15억으로 짐작하나 정확한 통계는 없다고 하며, 중국은 23개의 省에 5개의 자치구, 4개의 직할시 ‘북경 천진 상해 중경’으로 나눈단다. 그리고 상해만 해도 면적은 우리 서울의 10배가 된다고 하며, 상해 인구는 1,840만명이다. 과연 놀랄만한 인구수다.
상해는 黃浦江을 경계로 하여 浦西와 浦東 으로 나누며 浦西는 옛날의 건물 및 조차지 지역이고 浦東은 90년도의 제1특구로 지정하여 한참 개발중이다. 공항에서 도심까지 자기부상열차를 움직일 30km의 선로가 건설중이며 상해의 최고건물은 88층 486m의 건물로 세기의 광장에 있다.
우리 임시정부청사에 들러 살펴본다. 옛날의 오래된 뒷골목의 민간인 건물을 우리 삼성재단에서 사들여 상해임시정부 청사를 기념관으로 개조, 시설을 보완하여 우리의 활동상과 중국정부와의 협조 및 도움을 준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국권을 상실하고 남의 나라에 와서 조국광복을 위하여 애쓴 우리 선조들의 행장을 볼 때 ‘지금의 우리는 과연 잘하고 있는지? ’ 한편으로 씁쓸해 진다. 촌지를 주니 부채를 준다.
이제 虹口공원으로 간다. 일명 노신공원이라 하며 상해시민의 산책로로써 1932년 윤봉길의사가 폭탄을 투척한 곳이기도 하다. 號는 梅軒이라 하며 윤문의 조상인 윤관장군의 27대손으로 고향은 충청도이다. 우리 조상 중에 존경할 만한 분이 있다는 것을 고맙게 생각하며 그 앞에서 기념촬영을 한다. 조상의 얼이 헛되어 지지는 않을는지... 진짜로 윤봉길 의사가 투척한 장소는 노신의 기념상이 서 있고 우리의 조상은 한옆에 기념비만 서있구나. 중국에서도 존경하는 분을 이렇게 대접해도 되는지... 梅軒을 기억하기 위하여 梅亭이란 정자를 짓고 여기에 의사의 生涯 및 활동상을 소개하고 있으며 기념품도 판다.
또 藝園으로 관광을 간다. 부모를 위해 18년간 지은 집으로 많은 怪石과 壽石, 진기한 것을 모아서 石假山을 조성하여 우리로 말하면 99칸 집으로 보인다. 너무 웅장하게 지은 덕분에 황제의 노여움을 사 신하를 보내어 조사하였는데, 황제의 상징인 용을 조금 달리 만들어 즉, 발톱을 4개로 고쳐 용케 피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지금도 용트림을 할 것 만 같다. 內園으로 가니 안채집으로 잔치를 하며 광대들의 묘기를 보고 창을 하는 무대가 있다. 무대 위를 보니 소리가 멀리서도 들리게끔 한 지붕이 있었는데 내부시설을 둥글게 말아 올려 구멍을 뚫어서 사방으로 흩어지는 소리를 한군데 모으는 공명을 이용한 시설이었다. 과연 지혜의 소산물이다.
가이드 왈 중국의 3개 특산물은 실크, 茶, 茶器 이며 문화국보는 무술, 경극, 서커스 라 하니 과연 그런가 싶다. 날이 저물어 상해의 항흥호텔에서 여행의 첫날밤을 묵게 되었다. 여기는 별로써 호텔등급을 표시하는 듯 했다. 헤아려 보니 110명중에 40기는 10명이 갔다. 최형진 부부, 박동식 부부, 최형진 지인 부부 , 그 외 김희복, 김경택, 본인 , 김유일이 그 일행이며 김유일 회장과 한방을 썼다.
2002년 8월12일 일요일
다음날 새벽 4시에 일어나 아침은 뷔페로 하고 7시 20분에 출발하는 지방인 安徽省 의 황산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으로 향하였다. 지방공항에서 출발후 한 시간만에 황산공항에 도착하였다. 공항에 내려 2시간 가량 버스를 타고 와서야 황산 아래에 도착하였다. 이 황산으로 말할 것 같으면 중국의 4대명산 泰山, 嵩山, 衡山, 黃山 중의 하나이며, 황산의 四絶은 奇松 ,怪石, 溫泉, 雲海를 말하며 이 황산의 소재는 안휘성의 남부에 있고 중국 제일의 기산이라 한다. 人間仙境으로 표현되며 또한 偉大, 奇異, 幻想, 險惡의 景色으로 인간의 찬사를 받아 왔다. 중국식 표현을 빌리면 千峰競秀, 萬壑崢嶸, 峽穀幽長, 鷄澗縱橫, 蒼松滴翠, 鳥語花香 이라 한다.
UNESCO 에서 지정한 문화유산의 산이라 그런지 쓰레기가 하나도 보이지 않구나. 慈光閣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玉屛站 까지 올라와서 조금 더 걸어 올라와 玉屛樓까지 온다. 노란 깃발을 보고 따라가야 길을 잃지 않고 갈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깃발을 들고 올라가고 내려가고 있구나. 돌계단이 많으나 이 산에서 나는 돌이 아니고 다른 곳에서 가져온 돌로 계단을 만들었다고 한다. 점심 후 정상인 蓮華峰까지 가는데 2시간 가량 걸린 것 같다. 돌출한 산봉우리에 계단을 옆으로 돌려 안개가 끼어서 그렇지 밑을 보면 아찔한 감이 들겠다. 자연석이 없는 계단은 시멘트로써 계단을 만들었으니 교묘하게 자연석 계단과 비슷하게 모양을 내었다.
내려오는 길은 무리와 떨어져 나 혼자서 北海, 西海로 간다는 게 다시 점심 먹은 곳인 玉屛樓 로 내려왔다. 물어 물어 다시 되돌아와 여러 번 정상에서 헤매다가 獅林大酒店 으로 찾아 들었다. 기진맥진하여 오니 다른 팀은 西海로 갔다고 하고 경택이가 보인다. 단체에서 빠졌다고 잔소리를 들었으나 그래도 반가웠다. 생환하였으니까.... 몇 개월간 한 중국어 공부가 조금 더 진지하게 하였으면 확실하게 찾을 수 있었을 텐데.. 많이 헤매고 많은 고초를 겪지 않을걸 하며 중국어 공부를 더 열심히 하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 아는 길도 물어가라는 속담을 도외시한 나의 자신감이 넘치지 않았나 싶다.
산길을 헤맬 때 길에 가마를 대어놓고 타라고 조르는 교자꾼들이 있었다. 산의 형상을 말할 것 같으면 옛날에 바다였다가 융기로 인하여 육지로 변한 관계로 기암괴석이 제멋대로 생겼으며 등산로를 내는 것이 자연의 생긴대로 하였고 계단을 설치하지 못하는 곳은 인공적으로 조성하였다. 소나무를 보니 우리와 다르게 잎이 조금 짧으며 줄기는 곧게 자라며 바람이 불고 구름이 많은 관계로 줄기가 한 곳만 자랐고 바위 위에 자생할려고 하니 옆으로 휘어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운해가 없다면 가히 절경이라 하겠으나 일년 중에 삼분의 이가 항상 구름 속에 있다고 하니 우리가 볼 수 있는 삼분의 일은 좋은 인연이 아니라면 볼 수 없을 수밖에... 우리의 진경 산수화는 중국에서 화풍을 이어받아 만들어 졌구나 하는 느낌을 철모형에게 말하였다.
여담으로 747년 선원 皇帝가 黃帝가 황제로 불리우고 난 후부터 黃山이라 부른다 한다.
37기의 회갑기념식을 이곳 황산 사림 호텔에서 열어준다. 우리 40기도 3년 후다. 벌써 나이들이 60객을 바라보구나. 생환기념이라고 독한 술을 조그만 잔에다 부어 많이 마셨다. 친구 좋고 분위기 좋으니 그럴 수밖에.... 피곤하여도 정신은 맑구나.
2002년 8월 13일 월요일
다음날 4시에 일어나 황산의 일출을 보러갔다. 淸凉臺에 올라가 보니 仙人峰, 望山峰, 飛老峰이 구름사이로 보이나 구름이 가려서 일출은 보지 못하고 구름사이로 산의 모습들이 우리 다도해와 같이 운무 속에 섬같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한다.
해가 뜨면 구름이 더욱 심해져서 보이지 않기에 일찍 일어나 보지 않으면 사진을 찍을 수 없다는 金海에서 온 사진에 몰두한 사람의 이야기가 이 좋은 황산운무를 찍기 위하여 8개월간 매일 그 자리로 올라온다 하니 무슨 일이든 자기분야의 일에 열중할 수 있다는 게 부럽다. 여기에는 산봉우리가 높고 워낙 골이 깊어 원숭이들이 많이 살아서 놈들의 분뇨냄새와 파리들이 들끓는다. 청량대 전망대에서 왼쪽을 보니 봉우리 위에 원숭이 모양을 한 바위가 보인다. 일명 ‘원숭이 바위’라 한다. ‘그럴 듯 하게 생겼구나. ’ 큰 소나무가 없이 그만그만한 솔들이 자연에 순응하여 바위에 뿌리를 내려 저 구름 속의 수분을 받아 생명을 유지하는 것 같다.
연꽃이 필 무렵
선기 어린 뫼뿌리를
그 누가 심어 대지 위에
연꽃이 피어 났을까?
어느해건 연밥이 맺히기만 하면
나는야
저 하늘 푸른 바다에 배를 띄우려네
이 시는 淸대의 화가 梅淸 이 黃山 蓮華峰을 그리고 거기에 써 넣은 시 ‘題畵 黃山 蓮華峰’이다. 산봉우리가 연꽃 같다 하여 蓮華峰이라 이름 붙인 것도 재미있지만 그 바위산에 蓮實이 맺히기를 기다렸다가 구름바다에 배를 띄워 따러 가겠다는 발상 또한 자못 호쾌하다.
안휘성 황산에서 浙江省 杭州 로 이동하여 오는 길에 청대의 옛거리를 관광하였으나 옛날의 영화는 광고도 없고 바람만 스산하게 불구나. 앞의 쇼핑에서 사람들이 많은 것을 샀으니 여기서는 구매력이 없을 수 밖에... 나도 茶잎 普耳차를 80$ 주고 하나 샀다. 과욕이나 아닌지... 알지도 못하면서 이름만 보고 샀으니 그럴 수 밖에...
황산에서 오후 2시에 출발하여 杭州 로 오니 장장 7시간이나 걸려 9시에 도착하였다. 지나온 도로를 보면 아직도 우리의 60년대를 연상케 하고 농촌의 풍경은 어디를 가나 다를게 없어 보인다. 산중턱에까지 차밭을 일구어 가꾸고 있고 기온이 높고 비가 많아 벼의 삼모작은 가능하나 벼는 일모작만 하고 다른 종류의 밭작물을 가꾼다 한다. 省간의 도로공사가 한창이어서 좁은 도로에 공사판과 대형차들이 오고 가는게 고개 산마루를 돌 때 아찔하다. 서로 양보도 없이 고개길에서 차대가리를 먼저 들이미는 게 시간과 체증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나 양보가 없는 데서도 질서가 유지되는 것을 보니 이해가 안간다.
돌아오는 도중에 우리가 탄 차가 펑크나서 3대에 편승하여 돌아 왔다. 버스가 고장나 쉬는 도중에 옆의 상점에서 땅콩을 4원 주고 샀다. 옛날 우리 진해 땅콩 닮았다. 삶은 계란 2개 1원 주고 사고 호빵도 한 개 1원씩이다. 해가 지고 컴컴한 농촌을 지나니 한 집에 한 등씩 불을 켠다. 어두울 수밖에는. 농촌이나 도시나 할 것 없이 국토개조와 같이 모두 공사장 판이다.
호텔에 오기 전에 항주에서 유명하다는 발마사지집에 갔다. 남이 씻겨 주고 주무르는게 처음이다. 처음에는 아프지만 시원한 감이 든다. 엘리베이터 입구에 보니 부산시장의 모습이 일행과 같이 사진에 보인다. 여기에 왔다는 증명일까 여기서 서비스를 받았는지 모르지만 사진이 걸려 있다는게 조금 그렇다. 사람도 많고 일자리는 없어 아가씨들이 여기서는 ‘사오지에’ 라 부른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남의 발을 주무르는 것이 직업이니 황산에서 본 어깨에 메고 가는 인부들의 모습도 연상된다. 고달픈 인생들이다.
2002년 8월14일 화요일
다음날 항주 관광을 한다. 먼저 靈隱寺에 들른다. 1600년 전 인도의 스님이 창건하였으며 하남성 소림사보다 200년 앞선다 한다. 주지인 지공 스님이 주재하실 시에는 마을의 개고기와 술을 다 먹고 마셨으며 이것을 먹지 못하면 힘이 없어 중생을 제도 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즐겼다고 한다. 이 절에는 해마다 10만명이 관광 온다고 한다. 높이가 20m 나 되는 석가모니 좌불상과 사천왕상 대웅전 500나한들의 모습이 우리와 다르게 너무 웅장하였다.
다음은 西湖 유람을 간다. 平湖秋月, 三潭引月, 金帶橋, 단교잔월 가이드의 설명이 있으나 요지는 서호10경에 속한다는 이야기다. 소동파가 3년간 이곳의 군수로 있으면서 인공제방을 쌓았다는 것이며 장개석의 별장이 여기 있으며 다른 쪽에는 인공섬에서 민물진주 조개양식장을 하고 있었다. 점심은 林彪가 있었다는 식당에서 해결했는데 소홍주 한 잔씩을 데워서 먹는 것이 신기하였다. 이것을 老酒라 하며 ‘魯迅’이 잘 먹었다고 한다.
항주의 꽃은 桂花로써 9월에 피는 꽃은 향기가 좋아 몸에 지니면 향내가 난다고 한다. 다음으로 六花塔에 갔다. 전당江을 내려다보고 있으며 바다에서 강으로 올라오는 파도를 막기 위해 탑을 세웠다는 전설이 있으며 강의 폭은 128m로 넓고 탑의 높이는 12층이고 팔각형으로 보이나 육화탑이라 한다.
유명한 龍井茶 농장에도 들러 차를 3통 샀다. 저녁에는 상해의 유명한 서커스를 구경하였다. 오랜만에 보는 진짜 서커스였다. 여러 가지 묘기가 있었지만 둥근테 안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6명이나 도는 것을 보니 생명을 내어 놓고 하는 무아의 경지라고나 할까. 아찔한 감을 느낀다. 구경을 마치고 나오니 무용수들이 일렬로 서서 배웅한다. 보니까 조그마한 샤우지에 들이다.
다음은 밤의 야경 상해의 外灘을 보러갔다. 浦西의 조차지의 건물을 그냥 외벽만 보수한 체 사용하고 있고 네온사인과 조명의 시설물 및 전기 사용료는 시가 부담한다고 하니 구경거리가 될 수밖에... 浦東의 야경은 높고 큰 건물의 휘황찬란한 네온과 조명의 현란한 움직임을 보고서 사진을 몇 장 찍고 돌아왔다.
2002년 8월 15일 수요일 광복절
다음날 참깨 5kg를 사고 공항으로 향하였다. 면세점에 들렀으나 눈 구경만 하고 사지 못하고 돌아왔다. 다음에는 조금 더 중국어 공부를 하여 백두산 등산 때는 제대로 된 중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짜이찌엔(再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