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륜산-보길도 탐사 산행을 마치고

산행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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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륜산-보길도 탐사 산행을 마치고

2,307 이동암(44) 2009.05.05 00:00

첫째날

망산 정기 산행때 마다 새벽잠 설치며 헐레벌떡이다. 명륜동 도착하니 그간 집행부의 노력덕인지 날씨가 우천일거란 예상에도 불구하고 전문산행이 아닌 관광을 겸한 산행이기에 가족친지들을 동반한 동문들이 많고 예약인원 거의 모두가 참여한 우리 산악회원들의 성의와 협조심의 뿌듯함이 기분좋게 한다. 동기 송의근이와 함께 자리를 잡고 설레이는 1박2일의 여정이 시작된다.

 

환갑이 지나도록 휴대폰없이 그렇게도 용하게 지내더니 이제 퇴직과 함께 사위가 사준 휴대폰에 재미를 붙인 의근이의 장난끼 어린 문자보내기 놀이(?) 모습이 학창시절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연상케 한다. 순조롭던 차의 달림이 고속도로를 접어들고 김해를 지나 진영터널을 지나고부터 예사롭지 않다. 지난주 가족행사 때문에 하지 못한 산행을 이번 이틀의 산행으로 보충할려는 나의 바램이 어긋나기 시작한다. 문회장님의 인사와 차기 황석산 산행이 창립기념 산행이라고 안내를 하고 해외 산행의 참가 독려등 차내 방송을 하면서도 느림보의 차량전진에 괜히 자기의 잘못인양 겸연쩍어하는 모습이 단체의 장을 맡았기에 우리보다 더심한 심적 부담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 전해온다.

 

벌써 두륜산 산행 들머리에 도착했을 시간을 지나 섬진강 휴게소 공원에서 점심을 먹는다. 그래도 모두들 기분좋은 식사시간이다. 산행코스와 오늘의 일정을 수정하고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대흥사 주차장 오늘은 한시간반 가량으로 대흥사 관람으로 일정을 축소한다고 한다.

 

대흥사

두륜산은 백두산의 頭자와 곤륜산의 崙자로 불렸으나 崙자가 바퀴輪자로 바뀐것은 연봉들이 바퀴처럼 둥글게 휘돌았다 해서이라 한다. 그 장엄하고 중후한 두륜산의 깊고 그윽한 골짜기에 서산대사의 예언인즉 "북쪽에는 월출산이 있어 하늘을 받치는 기둥이고 남쪽의 달마산은 튼튼한 지축이요 동으로는 천관산 서쪽으로는 선운산이 우뚝 솟았으니 바다와 산들이 호위하는 천혜의 복지가 있으니 만세토록 훼손되지 않을 절이 있다"고 했으며 그곳에 자리잡은 가람이 대흥사이다 .그래서인지 임진왜란, 6.25 동족상잔도 이곳을 비켜갔다고 한다. 또한 대웅보전, 천불전, 침계류의 현판은 서체 동국진체를 개발 창안한 원교 이광사의 글씨이고 가하루 현판은 이삼만의 글씨이다 표충사는 정조의 친필 현판이며 무량수각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이다. 또한 초의선사의 초상화는 소치 허유의 그림이니 조선후기 당대의 내노라하는 이들의 서예 전시장 이기도 하다.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로 귀양가면서 이광사가쓴 대웅보전의 글씨를 망친 글씨라며 화를내며 떼어내고 자신의 글씨로 현판을 걸게했다가 귀양이 풀려 돌아올때는 자기가 잘못 보았다고 다시 바꾸어 걸게 했다는 일화도 있으며 다도로 유명한 초의선사와 다산 정약용, 선사가 제주도 유배지까지 만나러 갔다는 추사 김정희의 교분은 우리나라 다도의 정립과 유교, 도교의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또 한가지 일화는 1894년 어느 일본인이 훔쳐간 정조가 의병장 서산대사의 충의를 기리는 표충사에 하사한 병풍을 1905년 돌려 받았으며 두폭은 찾지 못했는데 1940년 그 병풍을 소지한 사람이 그 병풍을 구입하고 가세가 기울어 폐가직전이라 예언자에게 물어니 한국의 유명한 절의 보물을 가졌기에 그렇다 하여 스스로 보내 왔었다고 한다.

 

 

동기 의근이와 초의선사의 초당이 있었다는 일지암 까지라도 갔다 오자며 산을 오른다. 두륜산 중턱 탁트인 풍광이 멋스럽다. 새로 꾸민 초당과 암자는 조금 어색해 보이지만 다녀 간다는 의미만 새기고 하산 모두와 함께 해남으로 출발한다. 또한번 집행부에게 스트레스를 제공한 먹걸이 천국 남도의 기상천외한(?) 저녁식사를 하고 땅끝 마을로 이동한다. 추정추정 내리는 비속의 한밤이동 - 온통 저녁식사 사건이 화제가 된다.

한집의 어처구니없는 몰상식이 관광천국을 지향하는 해남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좋은 예가 될것이리라.

 

도착한 숙소의 방배정이 끝나고 산행후의 피곤이 아닌 긴  차량이동 여독으로 인한 피로가 앞서지만 끼리끼리의 밤향연은 3층을 주요 무대로 새벽까지 "동고야!"  "위하여!" 소리가 밤비와 까만밤을 흔들어 댄다.

 

둘째날

새벽 다섯시 기상과 조식- 대부분 어제 얼굴이 아니다.  날씨와 엊저녁 의기충전이 너무 지나쳤다는 모습이다. 보길도 가는 선착장에 늦을새라 재촉하여 도착 또한번 황망함을 감출수 없다. 이제 모두들 예약문화에 적응한 우리들에게 예약이 필요없는 승선순서는 우리를 처마밑에 쪼르르 모여있는 제비꼴로 만들어 버린다. 승선을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 연인끼리, 가족끼리, 단체끼리 모두들 비오는 하늘 한번 쳐다보고 바다 저 건너에서 닥아오는 페리선을 바라보며 제각기의 모습들을 연출해 낸다. 비가와서 인지 모르지만 모두들 엊저녁의 밤역사가 심상치 못한 후유증을 앓고있는 얼굴들이다.

 

조화도 도착 오늘의 산행 들머리로 이동하지만 비는 여전히 그치지 않고 결국 41명의 적은 인원으로 산행시작 이다. 태고의 동백 원시림 속으로 만들어 놓은 산행로- 환상적인 산행로이다. 완만한 산세로 인한 경사없는 산행로는 더욱더 산행을 즐겁게 한다. 안개로 인한 조망권 박탈만 없었다면 이길 한없이 걸어도 좋으련만 하늘이 모든 것을 다갖고 가지 못하게 하는게 원망스럽다. 같이 산행하는 의근이의 산능선에서 내려보는 풍경사진 못찍게 하는 안개를 원망하는 푸념은 계속되지만 적자봉, 수리봉을 거쳐 환상의 산행을 마친다.

 

어제 목욕 생략한 댓가로 마련된 전복죽의 점심식사- 전복의 명산지에 특산품의 식사는 우리를 더욱 즐겁게 한다. 차량으로 몇곳의 전망대를 둘러보고 예약은 했지만 필요없는 어제의 예를 생각해 선착장에 도착하니 나가는 배는 또 예약을 충실히 지킨다고 한다. 회장님 말마따나 이곳은 이곳 사람들이 정하면 법이 되는 희한한 천국이다.

 

보길도와 고산 윤선도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윤선도의 유배지 보길도는 유배지가 아닌 만년의 은둔지이다.

평생을 유배와 은둔을 거듭하다 고향 해남에 은둔을 하던 효종의 스승 윤선도는 51세 당시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강화도로 피신했다는 소식에 사병과 재물을 갖고 강화도로 임금을 찾아 뱃길로 가보니 벌써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자신의 인생의 허무함과 임금을 잘못 보필해서 항복의 굴레를 임금께 드렸다는 자책감으로 제주도로 은둔의 생활을 위해 가다 이곳 보길도의 격자봉의 산세가 수려함에 반해 수원에 있던 본가의 집을 헐어 그재목을 이곳으로 가져와 조선시대 대표적인 정원양식으로 정원을 꾸미는등 낙서재, 동천석재, 세연정등을 짓고 주자학을 연구하고 어부사시사등 주옥같은 한시를 창작하며 만년을 보내었다고 한다.

그리고 보길도엔 고산의 영원한 정치적 숙적 송시열도 제주도 유배지로 가던중 풍랑을 만나 이곳 보길도에 잠시 체류중 고산의 인품과 보길도의 수려한 풍광을 바위에 새긴 유적지도 있다고 한다.

 

4시 정각 대형 페리 장보고호로 바다를 건넌다. 하늘은 비개인 따사로운 햇살로 아름다운 다도해의 섬과 바다풍경을 우리에게 선물을 준다.

윤선도, 송시열이 아니라도 반해버릴 우리나라 땅끝의 보물 같은 풍광이다. 해남으로 이동 목욕, 식사후 밤8시가 넘어서야 부산으로 출발이다. 막히지만 아니하면 3시간반 후면 명륜동 도착이란다. 그러나 도착은 새벽 1시를 넘겼다. 우리 모두를 위해 애쓴 집행부 모두와 장시간 운전에도 불평 한마디 없었던 두 운전 기사님께 다시한번 감사의 말 전하며 이글 맺을까 합니다.

여러분 감사 합니다!

 

망월 산악화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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