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 전 명 ; 하늘같은 선배님들 하늘나라로 모셔라!
총 지 휘 ; 한현근(49)
현장총괄 ; 김종포(50)
행동대장 ; 김성진(54), 박철수(49)
사용도구 ; 로프(국립공원 관리소 협조)
대 상 ; 강기홍(33), 김효일(35), 백홍기(37), 이동암(44), 김환(45)외 3명
현 장 ; 문경새제 마패봉과 부봉 5개소 일원(고도 900 이상의 7개소)
특 명 ; 50대이후 기수는 절대 참여불가
가을비가 오늘의 산행에 대해 약간의 불안감을 안겨준다.
회장님의 인사중 산행시작과 함께 개인 날씨속에 즐거운 산행을 기대하지고 하니 30명 모두가 그런 바램으로 도착지 도착하니 비는 그치고 모두들 기대를 걸고 들머리에 들어선다.
그러나 자욱한 안개는 결국 위의 작전을 집행부에서 결행할 계기가 된다.
가득한 안개는 6개의 봉우리를 하늘나라 6개의 섬으로 만들고 그섬 마다의 도착은 엄청난 팔다리의 힘과 벼랑끝의 담력을 요구하지만 하늘나라 신선이된 착각을 느끼게하고 무한의 세계를 경험케 한다.
가을의 능선과 계곡 기암괴석의 웅장함을 느끼기 위해온 이곳에서 대간의 기와 하늘나라 신선의 느낌을 받고 끝을낸 오늘의 산행은 또 하나의 재미와 알지 못하면서 알게한 그무었을 우리들에게 던져준 산행이었고
또한 옛날부터 문경새재는 요새로써의 역활을 톡톡히 하면서 국방의 중요 요충지였다.
임진왜란시 왜장 소서행장은 상주성을 함락하고 한성 점령에 최대의 고비를 문경새재 통과 문제로 삼고 가등첨정의 군사까지 합하여 군세를 재편성하여 골돌히 전술을 찾고 있었고 우회를 하느냐 아니면 침략후 최대의 손실을 감수하고 통과 하느냐등 작전 구상중 이었는데 조선의 명장(?) 신립의 멍청한 작전인 문경세재 철수후 충주 탄금대의 저지선 구축으로 무혈통과케 하여 역전과 반전의 기회를 놓치고 탄금대 저습지 에서의 기마병 작전 이라는 웃기는 작전과 전사가 아닌 자살로써 한성 함락의 기회를 주고 말았다.
이곳에서 우리의 승전이 있었다면 왜병의 기를꺽고 이순신 장군의 남해안 봉쇄와 각지역 의병의 승전에 힘입어 왜병의 궤멸까지 갈수 있었는데 ..........
이러한 패망과 패전의 장군을 충장공이라는 시호를 내리기 위해 신립 장군 설화까지 유포하여 문경세재 철수는 요귀의 술수에 걸려 일어난 일이지 장군의 뜻이 아니었다는 희한한 설화가 생겨났고 그의 자손들이 인조반정 공신으로 대대의 권문가가 되면서 부터 순절명장으로 추앙 받고 있는것 등을 성벽을 걸으면서 나를 습쓰레하게 웃음 짓게도 한 산행이었다.
퍼온글 모음
높고도 험하다 하여 새재라는 명칭이 있는 만큼 임진왜란 때는 왜군의 선봉부대 고니시유끼나가(小西行長)도 이곳에 조선군의 매복군사가 있을 것을 두려워하여 감히 접근을 못하고 “가또기요마사”의 부대와 합류하여 넘었다 한다.
당시 조선에서는 왜군에게 연패하면서 신립에게 이곳에서 왜적을 맞아 싸울 것을 명하였으나 애석하게도 신립의 오판으로 이곳을 버리고 충주 탄금대로 결전장을 바꿈으로 해서 조선군 8천명 전원을 몰사케 함으로 인하여 이후 왜군과 제대로 된 교전 없이 패주만을 하게 된 원인이 되었던 통한(痛恨)이 서린곳이다.
신립(申砬)
1546(명종 1)∼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입지(立之). 아버지는 생원 화국(華國)이다.
어릴 때부터 글읽기보다 무예닦기를 좋아한 그는 23세 때 무과에 급제한 뒤 선전관·도총관·도사·경력(經歷) 등의 벼슬을 거쳐서 외직인 진주판관으로 나갔다.
이때 문장가로 이름난 진주목사 양응정(梁應鼎)으로부터 거친 성격을 고칠 것을 종용받기도 하였으며, 한편으로는 목사를 스승으로 삼아 배우기도 하였다.
1583년(선조 16) 온성부사로 있을 때 이탕개(尼湯介)가 거느린 야인(野人)들이 침입하여 훈융진(訓戎鎭)을 공격하자 첨사 신상절(申尙節)이 위급함을 듣고, 유원첨사(柔遠僉使) 이박(李璞) 등과 합세하여 적병 50여명을 목베고 이어 적군을 추격, 두만강을 건너가서 그들의 소굴을 소탕하였다.
또 경원부(慶源府)와 안원보(安原堡)에 침입한 야인들과 같은해 5월 종성에 쳐들어온 이탕개의 1만여 군대를 물리쳤다. 그는 평상시에 철기(鐵騎) 500여명을 정병으로 훈련시켜 그 민첩함이 귀신과 같았으므로 야인들이 모두 감복하였으니, 이때 육진(六鎭)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의 용맹 때문이었다.
이 북방의 전승이 보고되자 조정에서는 1584년 3월에 그를 함경도북병사로 임명하고, 남철릭(무관의 公服의 하나)·환도(環刀)·수은갑두구(水銀甲頭口) 등을 하사하였으며, 그의 노모에게는 매일 고기와 술을 보내고 병이 나면 의원을 보내어 치료하게 하였다.
1587년 2월 왜선 18척이 전라도 흥양현(興陽縣)에 침입하자 우방어사(右防禦使)로 임명되어 군관 30명을 거느리고 토벌에 나섰다가 이미 왜구들이 철수한 뒤라 돌아오던 중 양가의 딸을 첩으로 삼았다는 삼사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으나 곧 함경도남병사로 다시 임명되었다.
1588년 고미포(古未浦)의 야인부락에 출정, 적병 20명을 목베고, 말 세필을 빼앗아 돌아왔다.
그러나 이해 10월에는 갈파지보(乫波知堡)의 수졸(戍卒)이 보장(堡將)을 맞대놓고 욕한 죄로 목베어 죽였기 때문에 대간의 탄핵을 받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의 한직으로 전보되었다.
1590년 2월 평안도병마절도사로 나갔다가 내직인 한성부판윤이 되었으며, 항상 군비(軍備)의 부족함을 논하여 조정의 신임을 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그를 삼도순변사로 임명하고 보검을 하사하였다. 그는 특청하여 유성룡(柳成龍)의 막하에 들어가 부장 김여물(金汝岉) 및 80명의 군관과 시정백도(市井白徒) 수백명을 모병하여 충주로 떠났다. 이어 부장 몇 사람을 거느리고 조령(鳥嶺)으로 내려가 지형을 살폈다.
이때 군관 60여명과 군졸 4, 000여명을 이끌고 남하하였던 순변사 이일(李鎰)이 경상도 상주에서 왜군에게 패하여 쫓겨와서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죽여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일의 재주를 아껴 용서하고 오히려 선봉장으로 삼았다. 이일은 왜군의 정세가 대적할 수 없을 정도로 대군이라고 보고하였다. 이에 김여물 등이 아군의 수가 열세임을 들어 지형이 험한 조령에서 잠복하여 전투를 벌일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군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넓은 벌판에서 기병의 활용을 극구 주장하여 군대를 돌려 충주성의 서북 4㎞ 지점에 있는 탄금대(彈琴臺)로 나아가 배수진을 치고 임전태세에 들어갔다.
이해 4월 28일에 배수의 진을 친 아군을 향하여 고니시(小西行長)를 선두로 한 왜군이 대대적으로 공격해옴에 따라 중과부적으로 포위되어 참패를 당하였다.
그 결과 아군의 힘을 믿고 미처 피난을 하지 않았던 충주의 사민(士民)과 관속들이 많은 희생을 당하였으며, 아군이 섬멸되자 그는 김여물·박안민(朴安民) 등과 함께 남한강물에 투신 자살하였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설화 내용******
신립은 경상도 사람으로 일찌기 비범함과 장래성을 엿본 권율에 눈에 띄어 사위가 되었다.
어느날 신립은 고향에 갔다오는 중 문경새재를 지나게 되었다. 허나 길을 잃고 날은 어두워져 어느 양반댁으로 보이는 집에서 하루 묵어가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그 집의 주인인 듯한 처자(처녀) 나타나서 말하기를 '이 집은 소녀 혼자여서 재워 줄수 없으니 다른 집에서 묵고 가시라'고 말한다.
큰 집에 혼자 있는 것이 이상하게 여긴 신립은 혼자가 된 사연을 알고자 처자에게 간청하여 사랑방에 들어 그 사연을 듣게 되었다.
사연인즉, 어느날부터 집안의 식구들이 하나, 둘씩 죽어나가더니 자신 홀로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날마다 귀신인지, 도깨비인지, 망나니인지 알 수 없는 자가 나타나 자신의 몸을 달라고 협박을 한다는 것이었다. 허락하지 않으면 오늘밤 처자를 죽인다고 하였다.
이에 신립은 그 도깨비의 정체를 알고자 처자에게 청하여 집에 묵으면서 그 도깨비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를 지났을까...대문에서 우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탈을 쓴 괴한이 나타나 처자를 희롱하기 시작했다. 신립은 무과에 붙은 실력으로 괴한을 내동이를 쳐 탈을 벗겼다. 처자에게 물으니 이 집 노비라 한다.
노비를 취조하니 자신은 노비고 아가씨는 양반인지라 반상의 법도상 자신의 여자로 만들수 없어 가족들을 하나씩 죽였다한다. 홀로 남은 처자는 의지할 데 없어 자신에게 올 것이라 생각하여 그런 짓을 하였다 한다.
처자에게 처리를 물어 노비를 죽이고 다음날 시신을 찾아 장사를 치루었다. 일을 다 마치고 한양으로 출발하려 하니 처자 또한 신립을 따라가게 할 것을 요구하였다. 신립은 장인권율의 사위로서 혼인한지 얼마 안되어 이름모를 처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안된다고 거절하였다.
그러자 처자는 다시 첩이라도 좋고 노비라도 좋으니 데려갈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신립은 첩이라는 소리에 장인이 오해할 것을 걱정하였고, 노비로 양반의 처자를 들일수 없다고 생각하여 일언 거절하고 길을 떠났다.
고개를 넘으려는 순간 뒤 멀리서 처자의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니 용마루에서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더니 바로 낭떠러지 아래로 투신하는 것이었다.
한양에 올라와 장인 권율을 만나니 권율이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다. 신립의 얼굴에 액이 드리워진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신립이 자초지종을 고하자 권율은 사위의 좁은 속을 한탄하며 '나라의 큰 인물이 못될 것이다.'하며 탄식하였다.
세월이 흘러 임진왜란이 터지고 말았다.
새재을 맡고 있던 신립장군은 문경새재에 진을 치기 시작하였다. 그때 예전의 처자가 나타나 " 장군님, 거기는 안됩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뒤로 물리기를 반복하였다. 진을 치는 곳마다 죽은 처자의 혼이 나타나 극구 거기는 안된다고 하였기때문이다.
후퇴를 거듭하여 탄금대에 이르자 신립은 정신을 차리고 한낱 귀신의 말에 홀려 탄금대에 이른 자신을 한탄하였다. 허나 이미 돌이킬수 없는 일이고, 장군은 어쩔수 없이 비장한 각오로 배수진을 치기로 한 것이다. 패장이라는 오점으로 역사에 남느니 차라리 죽음으로써 명예를 지키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 신립장군과 병사들은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적과 싸우다 모두 장렬히 전사하고 만다.
결론은
아무래도 설화이다보니 역사적 사실과는 다른 부분이 있다. 신립은 경상도 사람이 아니라 황해도 평산사랍이고 권율의 사위도 아니다. 신립의 장인은 무인(武人)최필신이라는 사람이다.
경상도사람이라 한 것은 신립이 문경새재를 넘게된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 꾸며진 것이고, 권율의 사위라고 한 것은 신립의 비범성을 나타내어 임진왜란때 큰 공적을 쌓을 것을 기대하고 임진때 공이 많은 권율을 내세운 것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