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행하는 수도승의 심정으로...
1,970
김종간(53)
2007.04.25 18:46
지난 3월 넷째 주 호남정맥 3구간 산행 이후 이렇다할 산행을 하지 못해 산이 그리워 병이 날지경이었으며 호남정맥 제4구간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4월22일 아침 날씨는 선선하고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어제 회사 동료들과 거창 수도산을 21킬로 산행한 뒤라 뒷무릎 인대가 당겨 걱정되었으나 호남정맥 전 구간 완주를 목표로 맘 먹었으니 자신과의 약속을 어길 수 없었다.
일행은 제일 막내 명헌이를 포함하여 29명으로 다소 느긋한 맘으로 편안하게 버스를 타고 갈 수 있었다. 고속도로 밖의 농가에선 봄 향기가 물씬 풍긴다.
며칠 전만 해도 벚나무들이 은세계를 만들더니 이젠 연두색 나뭇잎이 제법 그늘을 만들 만큼 자라고 있다.신록이 대자연의 주인으로 바뀌는 계절이다. 갖가지 꽃들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차창 밖으로 흐르는 봄 풍경은 비발디의 사계보다는 뷔제의 아를르의 여인 중 목가(Pastoral)를 더 연상케한다.
버스는 순천 톨게이트로 잘못 들어가 다시 유턴하여 광양 톨게이트로 나와 봉강면 성불사로 향한다.
성불사 앞에서 발대식을 갖고 10시 5분 경에 산행이 시작되었다.어제의 무리한 산행으로 다리가 시큰거려 아예 후미 그룹에 자리 잡고 올랐다.비가 온 뒤라 길이 축축하게 젖어 있어 미끄러웠다.
평소 후미 그룹에서 산행치 않았는데 오늘은 형수님들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산행로에는 우리의 야생화가 어김없이 반겼으며 꽃 이름과 특징을 선생처럼 설명하며 아는 체를 했다. 사실은 혁이 삼촌 만큼 따라가려면 풀 꽃 나무에 대한 지식은 걸음마 단계다. 그래도 내가 아는 야생화가 많이 피어나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다. 각시붓꽃, 개별초, 선괭이눈, 현호색, 양지꽃, 말발돌이, 얼레지, 남산제비꽃, 졸방제비꽃, 노랑제비꽃...
산길은 안개가 많이 끼어 있어 서늘했으나 새재까지
오르는 길은 워낙 급경사라 땀이 팥죽처럼 흘러내렸다. 컨디션이 좋지않아 천천히 거북이 걸음으로 계속 올라갔다. 다리는 당기고 어제의 휴유증으로 힘이 빠져 당장이라도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고행하는 수도승 심정으로 한걸음 한걸음 씩 내 디뎠다.
걱정 어린 선배님의 말씀에 위안을 얻고 신록의 대자연에 몸을 맡기고 야생화의 아름다움에 흠뻑젖어
경사길을 오르니 드디어 새재가 나타났다. 인호 선배님 왈 "새재가 와 이리 높노? "하신다. 선배님도 어지간히 힘드셨나 보다.
새재에서는 평탄하게 오르락 내리락 하는 길이었건만 오르막은 참을 수 있으나 내리막길은 영 힘이 들었다.제일 마지막에 쳐져 좀 쉬고 있으니 한현근 선배님이 괜찮으냐 물으신다. 좀쉬고 가겠으니 먼저 가시라 하고 약 10분간 쉬면서 토마토 3개를 먹고 나니 기력이 회복된다. 오늘 산행로는 새재에서 좀 힘든 것 외에는 아주 좋고 멋진 코스인데 어제의 무리한 산행으로 내겐 한 걸음 한 걸음이 고통의 연속이다. 왼 쪽 뒷무릎의 아픔이 산행 내내 지속되었다.
이제부터의 산행은 혼자만의 외톨이 산행이다. 후미와 약 10분 차이가 난데다 천천히 걸으니 점심 먹을 때까지는 20분은 족히 차이가 날 것이다.
안개가 희뿌옇게 서린 길을 혼자서 천천히 걷고 있노라니 여러가지 상념에 사로잡힌다. 내가 걸어 온길 앞으로 걸어 가야 할 길 어떻게 살아야 의미 있게
살 것인가 곰곰 생각하며 가고 있으려니 진달래 꽃잎이 낙화하여 풀잎 위에 늘어져 있어 땅에서 갓 피어난 듯 아름다운 한폭의 수채화를 연상케 한다.
길가엔 치마폭을 오므린 얼레지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햇살이 가득하면 얼레지들이 저마다 치마폭을 활짝 펴고 교태를 부리며 유혹할 것이다. 이렇게 안개 끼고 바람 부는 날엔 얼레지마저 제몸을 꼭꼭 걸어 닫고 문단속을 한다.
일행이 식사하는 장소에 도달하니 거의 식사가 끝나가는 무렵이다. 51회 종복 선배님과 55회 재근,58회 길명 후배가 일부러 식사 시간을 조절해 주어 혼자만의 식사를 면하게 해 주었다.먼저 식사하신 그룹이 일어나 산행을 서두른다. 좀 서운한 맘이 들어 이젠 제일 늦게 가더라도 완주하겠으니 먼저 도착해도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알려 주겠다고 호언했다.
길명이가 찬식이에게 친구 하지 말라고 농 반 진담 반으로 얘기하니 이때부터 찬식이가 정신차렸다.
다리 아프고 힘들어 하는 동기와 함께 하겠다고 맘 먹었는지 내내 옆에서 지켜주고 기다려주었다.
월출봉 월출재를 지나 내리막길은 또 힘이 들고 아팠다. 저점을 지나 깃대봉을 오르는 길은 참을만 했다. 찬식이,종복 형, 재근 후배,길명 후배가 나와 한 그룹이 되어 후미에 섰다. 깃대봉 오르막을 계속 오르고 있노라니 정말 인터넷에서만 보아왔던 낯 익은 꽃나무가 있어 관찰해보았다
오!
그 꽃나무는 다름 아닌 "히어리" 였다.
히어리를 야생에서 보다니 너무 반가와서 일행들에게 소개시켰다.그런데 한 그루만 있는게 아니고 여기저기 히어리 꽃이 피어난 나무들이 여럿 있는게 아닌가. 히어리는 장미목 조록나무과의 낙엽 관목으로 지리산에 주로 자생하며 잎은 하트 형이며 꽃은 4월에 피고 연한 황록색으로 8-12개의 꽃잎이 총상꽃차례로 달린다.
히어리를 야생에서 보았다는 기쁨으로 오늘의 산행에 만족해야 했다
깃대봉에 오르니 몸은 아프고 맘은 이미 지쳐 있었다. 흑석산 깃대봉도 내겐 고통스런 산행이었다. 깃대봉과는 악연이라고 표현하기는 뭣하지만 여하튼 내게 있어서는 기억에 남는 산행이다. 깃대봉에서
이미 B 코스로 결정하고 천천히 내려왔다 . 뒤로 걷기도 하면서... 찬식이가 곁에서 친구되어 주어 다리 아파도 좀 참을 만하다. 이래서 친구가 좋은가 보다. 미사치까지 가는 길은 참 좋은 길이다. 든든한 친구가 보디가드도 되어 주어 더 좋았다.
미사치에서 갓걸이봉-마당재-죽정치까지 못다한 산행은 다음달 제 5구간 산행전에 꼭 밟아야겠다고 맘먹고 아쉽지만 편안한 마음으로 하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