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9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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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화(48)
2005.02.12 02:30
백두대간 9차작성자 박선화(48)
백두대간 9차 2001. 12.23
개인적인 사정으로 산행 참가가 안 되는 중에도 한현근(49) 총무는 매 산행 때마다 전화를 걸어온다.
1주일 전 옥계 팔각산의 송년 산행에 전 가족이 참가하였고 방학을 맞는 첫 산행이라서 참가하게 되었는데, 문진신(74) 후배와 한현근(49) 총무가 자리가 없어 보조석과 복도에 앉아서 가게 되어 송구스럽기 짝이 없다.(총 48명).
7시 15분 명륜 지하철을 떠나서 문산 휴게소(8시 20분)에서 약 20분간 쉬었다. 마산가기 전에 마금산 쪽으로 터널이 많은 새길을 달렸다. 면사무소가 있는 서상(9시 26분)에서 좌회전하여 약 2㎞쯤 가면 논개 묘소를 볼 수 있지만, 계속 직진하여 국도를 가다가 복동(9시32분)을 지나 육십령 고갯길을 오른다. 산행 후에 다시 이 고개로 돌아오겠지만 버스는 그냥 넘어간다. 수무촌에서 좌회전하여 논개 생가가 있는 대곡호 옆을 지나 무령고개 주차장(10시 5분)에서 내렸다.
벽계 쉼터를 10시 25분에 출발하여 영취산(10시 50분)에 도착하였다. 이 산정에서부터 금남. 호남정맥이 갈라진다고 하는데 그저 여기 저기 맥이 어딘지도 모르게 종잡을 수 없는 산산산…. 계속 진행하여 덕운봉(956m) 옆 소정상(11시 30분)을 지나 암릉 릿지를 따라간다. 집사람과 두 아이들은 힘들다는 말없이 잘 따라온다.
13시에 안부에 이르러 중식을 먹었다. 안내 표지판에 영취산 6.3㎞ 육십령 6.5㎞라고 쓰여 있다. 14시 20분 깃대봉(1014㎞)에 닿아 잠시 휴식을 취한 후 계속 간다. 멀리 육십령을 넘는 도로가 눈에 들어온다. 표지판에는 육십령 2.5㎞. 얼마 남지 않았다. 대간길을 가지 않고 아래 주차장 쪽으로 버스를 보고 내려간다.
15시 20분 주차장 도착. 눈길을 5시간 온가족이 달려서 육십령 매점에서 약간의 음료수로 목을 축였다.
버스 안에서 옆자리의 구본희(30회) 선배님께서 건강이란 애써 지키지 않으면 얻어질 수 없다고 하신다. 절대로 독한 술을 마시지 않고 채식을 하시며 육식은 먹지 않으며 생선도 드시지 않으신다고 하신다. 상봉산악회에서 산행에 주로 참가하신다고 하는데 연세에 비해 무척 젊게 느껴진다. 건강이란 몸의 튼튼함 보다는 그것을 지키려는 좋은 정신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오랜만에 백두대간에 참가하여 온가족이 눈산에서 함께 보낸 보람찬 하루였다.
'주 논개'는 대곡리 주촌 마을에서 '주 달문'의 딸로 1574년에 태어났다. 경상 우병사 최경회의 아내를 병구환을 해준 것이 인연이 되어 그 부인이 병으로 죽은 후 최경회의 아내가 되었다. 김시민 장군에게 진주성에서 크게 패한 일본군이 대대적인 보복전을 펼치게 되고 이때에 성을 지키던 최경회와 많은 군졸들이 자결을 하게 된다. 이에 기생으로 변장하여 적장을 안고 남편 최경회가 몸을 던진 강물에 빠져 '충절의 표상'으로 추앙받게 된다.
몇 년 전 전북 장수의 주씨 집안사람들이 일본과 진주시청 앞에서 항의 시위를 벌였다. TV에 소개된 내용은 논개 묘소와 사당이 일본에 조성되어 있는데 그에 대해 진주시에서 많은 잘못을 했다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임진왜란 때 진주성을 함락시킨 명장으로 추앙받는 게다니무라 로쿠스케의 후손이라고 하는 어느 기업인이 진주성 촉석루 아래 의암(논개가 왜장을 안고 강물에 몸을 던졌던 바위)에 와서 한국 스님의 도움으로 논개의 혼백을 건져 올리는 의식을 행하였다. 그리고 촉석루 옆 논개 사당에 논개 영정을 그린 화가에게 부탁하여 논개 영정을 그리게 하여 가져갔다. 이에 대해 진주시에서는 양국의 민간외교 개선이 크게 이바지 하였다 하여 그 일본 기업인에게 감사장을 주었다고 한다. 이 로쿠스케의 후손은 이 그림과 혼백 건진 것을 일본에 가져가서 로쿠스케의 무덤 옆에 논개의 사당과 부도탑을 만들어 죽은 조상의 혼을 달래게 하였다. 논개 부인이 이국땅에서 외롭지 않도록 주변 모습을 진주성과 비슷하게 꾸며 놓았다고 한다.
TV에 소개된 부도탑에는 한자(해서체)로 ‘논개묘’라고 쓰여져 있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일이다. 주씨 집안사람들이 일본까지 가서 논개묘를 없애달라고 하였으나 그 일본인 후손은 물론 일본 정부도 개인의 일에 간섭할 수 없다고 하며 거부했다.
우리가 무심코 쓰고 있는 물건 중에 내 나라 것이 많이 생산되는데도 일본 것을 애용한다면 한번쯤 깊은 생각을 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