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의현감연암박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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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의현감연암박지원

3,244 박선화(48) 2008.02.08 20:48
안의 초등학교 교정에는 연암 박지원 선생의 안의 현감으로 재직한 사적비가 있습니다. 산도 보고 역사도 챙기고 유적도 보면 일석다조가 되는데.. 중국 승덕에는 청나라 황제들의 여름 별장인 '피서 산장'이 있는데 연암 박지원이 피서중인 황제를 만나러 왔던 곳입니다. 이곳에는 열하의 시발점이 되는 따뜻한 물이 나오는 강의 원천이 있습니다. 중국 여행길에 한번 다녀 오십시오. 박지원(朴趾源, 영조13-순조5, 1737-1805) 조선 후기의 소설가. 문신. 학자. 서울 출생.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 연상(烟湘). 열상외사(洌上外史). 아버지는 사유(師愈), 할아버지는 지돈녕부사 필균(弼均)이며, 어머니는 함평이씨(咸平李氏)이다. 연암은 이런 명문 거족에서 태어났으나 어렸을 때에 그의 아버지 사유(師愈)가 일찍 죽으므로 그의 조부인 필균이 양육하였다. 1752년(영조28년)에 전주 이씨 보천(輔天)의 딸과 혼인하면서 {맹자}를 중심으로 학문에 정진하게 되었다. 수년간 학업에서 문장에 대한 이치를 터득하였고, 처남 이재성과 더불어 평생 문우로 지내면서 그의 학문의 충실한 조언자가 되었다. 1760년 할아버지가 죽자 생활은 더욱 곤궁하여졌고, 1765년 과거에 응시했다가 실패한 후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오직 학문과 저술에만 전념하였다. 1768년 백탑(白塔) 근처로 이사하여 박제가. 이서구. 서상수. 유득공. 유금 등과 이웃하면서 학문적 교류를 가졌다. 그러나 당시 홍국영이 세도를 잡던 시기라 벽파인 그의 생활이 어럽게 되어 결국 황해도 금천(金川) 연암협(燕巖峽)으로 은거하여 농사와 목축에 대한 정리를 하게 된다. 이때 그의 아호가 연암(燕巖)으로 불려진 것도 이에 연유한다. (1780년(정조4년)에 삼종형 박명원(朴明源)이 청고종 70세 진하사절로 북경에 갈 때 수행하여 압록강을 거쳐 북경. 열하를 여행하여, 그후 [열하일기]라는 불세출의 견문록을 남겼다. 1786년 음사(陰仕)로 선공감 감역 등 말직에 머물다가 1792년 안의현감(安義縣監) 1797년 면천군수(沔川郡守), 1800년 양양부사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고 1805년 69세의 일기로 그의 일생을 마쳤다. 그러나, 그가 안의현감 생활을 하면서 쓴 (열하일기)와 면천군수 시절에 남긴 {과농소초}. {한민명전의}. {안설} 등은 연암의 현실 개혁사상을 이론적으로 펼쳐보인 대표적인 저서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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