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들의 축제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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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곤(36)
2005.05.02 11:30
19회 망월가족 등산대회 산행기 입니다.
김 진 곤(36회)
벌들의 축제
봄비가 촉촉이 내린 금정산자락, 바람 한점 없고 따스한 해맑은 날, 햇볕 사이를 뚫고 들려오는 잔잔한 울림, 귀를 조금씩 벌려 본다. 봄이 오는 소리인가. 완연한 봄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금정산은 아늑하게 느껴진다. 이 산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은 저마다 꿈을 품는다. 건강, 휴식, 추억, 사랑 .... 등을 위하여 말이다. 누구든지 저 잘생긴 산 능선을 보면 마냥 행복해 한다.
오늘은 고교 총동창회 가족등산을 하는 날이다. 선후배 동문들이 봄의 향기로 가슴을 여는 열아홉 번째로 맞는 날이다. 진한 봄 내음과 흙냄새를 진동하는 금정산골 남문 옆 연못을 향하여 산을 오른다.
4월의 부드러운 햇살은 능선과 계곡에도 가까이 다가와 있다. 황사가 걷힌 파란 하늘처럼 가벼워진 내 마음이 깃털처럼 날아 갈 듯이 가득 차 있다. 연녹색 이파리로 몸단장한 산자락은 화사한 봄기운으로 가득하고, 겨울동안 갈아 앉아있던 내 마음도 가볍기만 하다. 건너편 산자락에 있는 산사에서 들려오는 목탁소리가 숲과 어울러져 묘한 화음을 만들어 낸다. 하나는 자연이고 다른 하나는 인공인데도 하나의 소리로 합치는 이치가 참 묘하다. 단한번의 리허설도 하지 않고 저토록 완벽한 선율을 빚어내니 말이다. 가파른 산길을 오르니 벌써 숨이 차서 잠시 넙적 바위에 앉아 쉰다. 갑자기 솔가지를 흔들며 나타난 청솔모 한 마리가 낯선 이를 보고 제풀에 놀라 달아난다. 사라진 숲속은 다시 조용해진다. 맑고 깨끗한 숲속의 정기로 심신이 맑아지는 개운함을 맞보며 다음 쉼터를 향해 다시 오른다.
봄 산을 찾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대는 산길은 잔칫집 같이 부산하다. 긴긴 겨울이 녹아내려 촉촉한 물기와 따스함이 적실 때면 분홍빛 봄 색깔로 몸단장한 진달래가 산 능선 따라 가득하다. 꽃잎이 너무 고와 먹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는 꽃은 뭇사람들을 편안하게 감싸 주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어린아이를 손잡고 걷는 어른들은 진달래꽃을 배경으로 연신 카메라의 셔터를 누른다. 메마른 가지에 고운 빛깔이 생겨나고 은은한 향기가 나니 생각할수록 신비롭다. 살아있는 생명의 신비는 그대로가 우주의 조화다. 꽃은 무심히 피고 소리 없이 지지만 이웃을 시샘하거나 괴롭히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런 꽃에 비하면 삶의 모습이 너무 시끄럽고 거칠다. 꽃이 사람들 눈에 띄는 곳에서 피어나는 것은 묵묵히 피고 지는 우주의 신비와 조화를 보고 배우라는 뜻일 게다. 사람도 그 삶이 순수하고 진실하다면 한 송이 꽃으로 모습을 들어 낼 수 있어 리라 생각해 본다.
산 정상에 올랐다. 아래쪽으로 우리네의 삶의 모습이 눈과 마음에 새롭게 담겨진다. 노송 사이로 보이는 거리의 나무들은 연녹색으로 옷 갈아입고 전철길 따라 펼쳐진 동래 온천장 일대와 마안산 끝자락 동래향교가 자리하고 있다. 옛말에 멀리 보려면 더 높이 올라가라는 말이 있다. 시야가 확 트이니 내 마음도 가뿐하다. 삶의 지혜가 이곳에 담겨져 있는 듯싶다.
예전에 부산에 전차가 다니던 시절, 종점 온천장에서 가끔 타고 다녔던 기억이 새롭다. 지금 기억으로 온천장 주변은 논밭이 있었고 시골과 다를 게 없는 모습 이었다. 지금 그곳은 옛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집결지에 도착하니 이미 많은 동문들이 나와 만남을 즐기고 있었다. 간단한 식이 끝나고 오래간만에 목이 터져라 교가를 불렀다. 지금도 귀에 찡하다. 다채로운 프로그램에 따라 윷놀이,줄넘기, 꽃씨 날리기도 하였다. 꽃씨 날리기는 동문과 가족이 오색풍선에 씨앗을 달아 하늘 높이 날려 보내었다. 모두가 동심으로 돌아가 날아가는 것을 보면서 마냥 즐거워 한다. 산과 들에 씨앗을 뿌리는 일은 자연을 자연답게 할 수 있는 우리들의 몫이다. 동문들이 함께하는 봄의 축제를 보면서 흩어진 구슬을 꿰듯 지난 기억들이 되살아난다.
지난번 모교에 갔을 때이다. 아름드리로 자란 은행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아 있었다. 떠난 지 40여년이 흘렀고, 중년이 훌쩍 넘겼지만 찾아온 내가 은행나무 앞에서 감회에 젖는다. 그때의 벚나무는 수명을 다하여 사라지고 없었다. 그 나무 아래서 하고 또 하던 영화얘기나 배우얘기가 공부나 시험보다도 더 중요했던 그때가 생생하다. 영화 구경을 갔다가 들켜 호되게 꾸중을 듣고서 벚나무 아래서 눈물을 떨구던 그때가 또렷이 살아난다. 고교시절의 일들이 정지된 영화 필름이 다시 돌아가듯 하나둘씩 되살아나서 나의 눈언저리를 적셔 놓는다. 가난을 훈장처럼 달고 살던 궁핍했던 시절, 오로지 영화만이 무지개 빛 꿈이었던 시절이 새삼 그리워진다.
교정을 한바퀴 돌아서 뒤뜰까지 왔다. 숲을 이룬 작은 동산에 눈길이 간다. “옥은 갈아야 광채가 나고 사람은 배워야 도를 아느니라”라는 돌비석은 예전처럼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저쯤에 음악실과 과학실 이었어 리라, 그 옆에는 연못과 체육실이 있었지. 새 교사가 들어선 지금의 뒤뜰은 낯설기만 하다. 잊어진 것은 어떤 것이고 기억하고 있는 것은 어떤 것인지, 어쩌면 흐르는 것은 시간이 아니고 사람의 나이인가 싶다. 망월가족등산대회 행사는 금정산골 상계봉에 해가 걸리면서 끝났다.
하산을 시작 하였다. 길을 멈추고 쭉 뻗은 나뭇가지 사이로 올려다보니 연초록 잎 새 사이로 봄 햇살이 은빛 비늘처럼 반짝인다. 싱그러워지는 계절에 동문과 가족의 의미를 다시 한번 곱씹어 보게 한다. 이쪽 금정산골에서 해마다 깊어가는 나이테처럼 든든한 버팀목 같은 만남이 계속되었으면 한다. 이제는 나를 조율하며 천천히 여유있게 삶의 숨결을 느끼면서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