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화대의 석주길(퍼옴) :혼자 보기는 아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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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흥만(47)
2005.06.10 10:54
송준호와 "석주길"
설악산은 너무나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갖고 있다. 솜다리꽃.박새풀.둥글레.함박꽃.전나무를 비롯해 하얀 껍질에 사연을 적어보내면 사랑이 이뤄진다는 자작나무가 도처에 널려 있다.
그런가 하면 설악골.용소골.토막골.곰골.잦은 바위골 등의 숱한 골짜기와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뛰는 용아장성.공룡능선.화채봉 능선.서북릉.천화대 등의 바위능선(암릉)과 대청.중청봉을 휘감는 바람과 구름, 그리고 동해까지 거느리고 있다.
거기에 설악시(詩)와 설악가(歌)까지 지니고 있다. 그 설악의 노래는 슬픈 노래다.
아니 서럽도록 아름다운 노래다.
너와 나 다정하게 걷던 계곡길, 저 높은 봉우리에 폭풍우 칠 적에… 설악의 봄.여름.가을.겨울을 노래한 설악가 속에 나오는 산(山)친구이면서 사랑하는 사이이기도 한 그녀는 가을 설악산에서 조난당해 세상을 뜨게 된다.
그녀를 설악에 묻고 그리움을 삭이지 못해 매번 설악산에 되돌아와 부르고 또 부른 노래가 설악가다.
굽이져 흰띠 두른 능선길 따라 달빛에 걸어가던 계곡의 여운을.
내 어이 잊으리요.
꿈 같던 산행을.
잘 있거라 설악아.
내 다시 오리니.
외설악 초입에 있는 노루목 근처 산자락에 가면 지금은 호텔과 여관 등 숙박시설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는 사자(死者)의 마을이 있다. 설악을 사랑하다 결국 설악의 품에 영원히 안긴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그곳에는 1969년 죽음의 계곡에서 눈사태로 목숨을 잃은 한국산악회 소속 대원 10명의 무덤(산악인들은 십동지묘라 부른다)을 비롯해 설악산에서 숨진 여러 산사람들의 묘지가 있다. 국토의 7할이 산인 산악국가로 산을 신앙으로 숭배하던 배달겨레의 유일한 산악인 묘지인 셈이다.
여기에는 이름없는 산사람들의 초라한 무덤들이 자그마한 동산을 이루고 있다. 상석은 고사하고 비석도 제대로 세워져 있지 않은 무덤의 주인공들은 벚꽃처럼 활짝 필 젊은 나이에 산에서 운명을 달리한 산사람들이다.
이 중에는 엄홍석과 신현주라는 두 남녀의 무덤이 있다.
연인 사이로 여러 차례 설악산을 함께 올랐던 두 사람은 67년 가을 어느 날 설악가의 가사 그대로 설악에서 등반사고로 함께 세상을 떴다.
이들과 같은 요델산악회의 회원이었던 송준호는 엄홍석과는 피를 함께 나눈다는 자일파트너(암벽등반 동료)인 동시에 의형제 사이였다. 그런 인연으로 송준호는 엄홍석과 신현주의 무덤을 자주 찾았다.
내설악과 외설악을 가로지르는 공룡능선은 설악의 주릉이다. 이 공룡릉에서 흘러내린 설악골과 잦은 바위골 사이를 천화대라고 하는 험준한 바위능선이 치밀어 올라 있다.
천화대는 여러 갈래의 작은 능선(지릉)을 거느리고 있는데, 이 중 설악골에서 왕관봉과 범봉 사이에 있는 성곽처럼 생긴 바위능선 하나가 유난히 눈길을 끈다.
송준호는 68년 7월 이 바위능선을 맨처음 오르는 산악인이 된다.
산악계에서는 등산코스를 개척한 초등(初登) 산악인에게 코스의 이름을 붙일 수 있는 명명(命名)권을 주는 것이 관례다.
송준호는 그 바위능선에 석주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의형제 엄홍석과 그의 연인 신현주의 이름 끝자인 석과 주를 따와 붙인 것이다. 그리고 자기 손으로 석주길이라고 새긴 동판을 만들어 석주길이 천화대와 만나는 바위봉우리의 이마 부분에 붙여 두 사람의 영전에 바쳤다. 그리하여 석주길이라는 신화가 설악산에 태어났다.
일제 말기 백령회라는 산악단체가 설립되면서 우리나라에 근대 알피니즘(모험적 등반행위)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해발 2천m 이하의 낮은 산들로 이뤄진 국내 산악환경은 알피니즘의 대상이 될만한 입지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
때문에 1970년대 후반 해외등반으로 그 출구를 찾기 전까지 한국 알피니즘의 수준은 짧은 암벽에서 이뤄지는 기교적인 등반에 머물렀다.
그런데 국내 알피니스트들에게 군계일학의 등반 대상이 딱 한 군데 남아 있었으니, 바로 설악산의 노루목 맞은편에 있는 토왕성폭포(일명 토왕폭)였다.
70년대 초만 해도 당시의 등반 장비나 기술로 토왕폭 빙벽을 오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때문에 전인미답이었던 토왕폭을 오르는 것은 히말라야 8천m급 봉우리보다 더 가치있는 등반이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다.
정말 그랬다. 그때까지만 해도 토왕폭은 설악산에서 살아 숨쉬는 신화였다.
그래서 당시 산악인들은 토왕폭! 토왕!을 되뇌는 것으로 스스로 산사람임을 깨닫곤 했다. 석주의 무덤이 있는 노루목은 토왕폭 건너편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화채봉에서 발원(發源), 함지덕.칠성봉 일대 골짜기의 물을 모아 하늘에서 내린다.
3백여m 높이의 얼음기둥이 자라나기 시작하는 겨울에 석주의 무덤에 성묘하고 뒤돌아 설악산을 바라본 적이 있는가! 거기서는 토왕폭 얼음기둥의 머리 부분이 보인다. 토왕폭의 아름다움에 산사람은 그가 평소 즐겨 부르던 설악가와 시도 때도 없이 노래하던 듀 프라의 그 어느날이라는 산악시가 하얀 얼음기둥에서 울려 퍼지는 듯한 환청을 듣게 된다.
그 어느날 내가 산에서 죽을 때 오랜 산친구 자네에게 부탁하네 내 피켈을 집어다오 이 피켈이 치욕 속에 녹슬어가는 것을 나는 원치 않는다네 어딘가 아름다운 페이스에 가져가 주게 그리고 그 피켈만을 위한 작은 케룬(돌무지)을 쌓아다오 그리하여 그 케룬 위에 나의 피켈을 꽂아주게 동해에서 치솟는 아침 햇살을 받아 토왕의 얼굴이 수정으로 빛날 때나 설악이 온통 잿빛으로 가라앉을 무렵 바라보는 토왕폭에선 신의 섭리를 느끼게 된다.
송준호는 석주에게 두번 절한 뒤 토왕폭을 뒤돌아 보고는 그때까지 아무도 오르지 못한 토왕폭을 단독등반하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 빛나는 토왕의 빙폭 위에 오랜 산친구 석주의 피켈을 꽂고 그곳에 석주의 피켈만을 위한 작은 케룬을 하나 쌓으리라고 마음 먹는다.
그리고 토왕폭 초등이라는 절대적 산행을 석주의 영전에 바치겠다고 다짐한다. 상단(1백40m).중단(60m).하단(1백30m) 등 세 부분으로 나눠져 있는 토왕폭의 전체 길이는 3백30여m에 이른다.
상단과 하단은 전체적으론 곧게 일어선 고드름질 직벽(直壁)이지만 임산부의 배처럼 불룩 튀어나온 곳도 있다. 상단과 하단을 잇는 중단은 30~50도 정도의 완만한 빙벽이다.
이같이 중단이 비스듬한 모양을 하고 있는 까닭에 상단과 하단간 수직(垂直) 길이는 전체 길이보다 약간 짧은 3백m 정도다.
1972년 12월 30일, 설악산의 날씨는 빙벽등반에 이상적이었다. 맑은 가운데 바람도 적당히 불었다. 기온은 섭씨 영하 10도 안팎을 나타냈다. 토왕폭 허리부분의 빙질(氷質)도 적당한 탄력을 유지했다.
오전 11시쯤 송준호는 사흘 앞으로 다가온 D데이를 대비해 토왕폭 정밀 답사에 나섰다.
아이젠도 없이 피켈만 들고 토왕폭 빙벽 하단을 돌아 중단의 완만한 곳에서 오른쪽 설벽(雪壁)으로 나아가 상단의 출발지점을 볼 수 있는 곳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출발지점을 자세히 살펴본 후 정식 등반 때 쓸 장비 일부를 근처 눈더미 속에 묻어두고 산을 내려왔다. 설악동에 이르러 그는 요델산악회의 선배인 백인섭씨(현 아주대 교수)에게 전보를 띄웠다.
토왕폭 빙벽의 상태가 등반에 최적임. 피켈.아이젠.아이스하켄 지참, 31일 비행기편으로 오기 바람. - - 준호
이튿날 날씨도 맑았지만 약간 강한 바람이 불었다. 오전 3시에 일어나 다시 설악동으로 간 송준호는 백인섭.박경립씨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통화를 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송준호는 토왕폭을 혼자 등반키로 결심하고 함께 훈련했던 서울대 상대 산악부 소속 두명의 산사나이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다음날인 73년 1월 1일 아침. 영하 8도의 기온 속에 맑은 날씨였다.
송준호와 지원조 두 명은 설악동에서 등반에 필요한 몇가지 물품을 구입한 후 비룡산장으로 올라가 잤다. 이날 밤 산장에서 송준호는 석주에게라는-이승에서 저승으로 띄우는-묘한 편지를 썼다.
주소란에는 이렇게 적혔다.
받는 사람=석주귀하
보내는 사람=준
받는 사람 주소=노루목
보내는 사람 주소=벽에서 잘 있었나.
그동안 나는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네.
내일 벽과의 감격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네.
아니면 자네 품으로….
등반할 나를 도와줄 S대 상대 OB인 J와 P 두 악우(岳友)를 소개하겠네.
기억해두고 깊이깊이 사귀어보고 싶은 두 사람이네.
석주도 고마워할거야.
나는 확신한다네.
아직 자네는 내 곁에 있다는 것을.
석주가 있기 때문에 나는 더욱 열심히 한발 한발 힘차게 오를 것이네.
정상에서 대화를! 노루목에서 일배하세! 좁은 지면 메우기보다는 서로 힘찬 격려로 서로를 지켜주면 좋을 걸세.
용아장성에서처럼.
후회하지 않을 행동뿐, 결코 두려워하지 않겠네.
나의 맘 한없이 메꾸고 싶지만 주고 받을 얘기는 토왕성의 하얀 벽 꼭대기에서! 여유를 가져보세.
1월 1일 설날 이러한 일이 있다는 것은 보람일세.
넘기기 싫은 하루였다네. 73년 1월 2일.
맑은 날씨는 여전했다. 영하 5도의 기온은 토왕폭 사나이의 긴장감을 유지하기에 적당했다. 오전 8시 40분 송준호와 지원조는 비룡산장을 떠났다.
이들은 토왕폭 상단 40m 지점의 고드름 기둥까지를 1피치(자일 한묶음의 길이로 40m 안팎)로 잡고 그곳에 70m 짜리 자일을 고정시킨 다음 출발지점의 지원조로부터 1백20m 짜리 자일을 넘겨받아 토왕폭 상단 빙벽을 2시간 정도에 끝낼 계획으로 등반을 시작했다.
토왕폭 빙벽 하단을 우회한 송준호와 두명의 지원 대원은 사흘 전 장비를 놓아두었던 곳에서 담배를 피우며 잠시 휴식을 취했다. 휴식을 마치고 중단의 완만한 경사 부분을 오르기 시작한 때는 낮 12시 15분쯤. 송준호는 70m 짜리 자일의 한쪽 끝을 몸에 묶고 올랐으며, 한명의 대원이 자일의 다른 한쪽 끝을 30m 가량 사려 배낭 위에 얹고서 뒤따랐다.
송준호를 뒤따라 오르는 대원은 송준호와의 거리를 5~6m 정도로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체력과 기량 차이로 갈수록 간격이 벌어졌다.
치밀한 성격의 송준호는 토왕폭 빙벽 단독등반에 나서기 전에 잦은 바위골의 50m와 1백m 폭포에서 두차례 훈련등반을 가졌었다. 송준호는 1971년 1월 후배 오세진과 함께 1백m 폭포를 11시간의 사투 끝에 겨우 올랐다. 이들의 등반시간은 요즘 기준으로 보면 납득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앞 이빨(프론트)이 없는 8발 아이젠에 길이 1m가 넘는 무거운 피켈 한자루에 의지한 채 아이스 하켄도 없이 종일 피켈을 휘두르며 스텝 커팅(빙벽에 발 디딜 계단)하면서 등반해야 하는 당시 상황으로선 결코 긴 등반시간이 아니다.
당시엔 그런 방식으로 잦은 바위골의 1백m 폭포나 토왕폭 같은 깎아지른 둣한 빙벽을 등반한다는 것은 불가능이라고 믿던 시절이었다. 송준호가 설악산의 1백m 폭포를 등정했다고 말했을 때 아무도 이를 믿지않았다. 이듬해인 72년 12월 중순, 설악산 잦은 바위골에서 두번째 훈련등반을 가졌다.
이때 송준호의 등산화에는 8발이 아닌 앞 이빨이 달린 12발 아이젠이 묶여있었다. 새 장비를 갖춘 그는 날쌘 표범처럼 15분 만에 50m 폭포를 올랐다. 그리고 11시간의 사투를 벌였던 1백m 폭포는 불과 30분 만에 등정했다. 얼음기둥 꼭대기에서 하얀 표범은 울부짖었다.
"석주야, 이제 토왕으로 간다.
토왕폭 위에 너를 위한 작은 케룬을 쌓고 그 위에 너의 피켈을 꽂아주마." 훈련등반을 통해 그는 토왕폭도 등정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1백m 폭포 등반 중 아이젠의 밴드가 풀어지는 위기를 만났지만 빙벽 위에서 발레하듯 절묘한 균형을 잡고 밴드를 다시 고쳐 맸다는 일화는 이제 송준호라는 이름과 더불어 전해지는 신화가 되었지만….
요즘 장비라면 1백m 폭포를 30여분 만에 등정할 수 있는 산쟁이가 드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70년대 초 쓰던 긴 피켈과 아이스 대거(얼음 송곳), 그리고 모래내 금강(M.K)에서 만든 국산 아이젠으로 1백m 폭포를 오르라고 한다면 누구도 등반할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
송준호가 토왕폭 상단 출발지점에 거의 다달았을 때 그와 지원 대원과의 거리는 40여m로 벌어져 대원은 허겁저겁 손에 감고있던 자일을 풀어줬다. 그러던 대원은 어느 순간 멈칫했다. 가파르게 턱진 빙벽이 눈 앞에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급히 경사가 심한 골을 피해 산행 방향을 바꾸는 순간, 그는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송준호를 지원하던 대원은 그 순간 "앙카!"라고 외치며 떨어졌다. 그 바람에 송준호도 밑에서 잡아채는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함께 추락할 수밖에 없었다. 앙카는 암벽등반 도중 위급 상황이 발생했을 때 도움을 요청하는 구호다.
동료의 외침에 놀란 나머지 중단 옆 안전지대에서 등반 과정을 촬영하던 또다른 지원 대원이 위쪽을 쳐다보았다. 재미로 그러는 것처럼 송준호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빙벽 중단 부분에서 미끌어지고 있었다.
그 밑에서 추락하던 지원 대원은 아이젠이 얼음에 걸리면서 천우신조로 추락 방향이 바뀌어 촬영대원이 있는 곳으로 떨어졌다. 다행히 이곳은 눈이 쌓여 있는 설사면(雪斜面)으로 안전지대였다. 하지만 송준호는 계속 떨어졌다.
추락의 가속도 때문에 그의 형체를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다. 송준호는 추락을 멈추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가 박으려는 피켈이 찌익 찌익하는 마찰음을 냈다. 그러나 갈수록 가속도가 더 붙는 그의 몸은 끝내 멈추지 않았다. 중단을 완전히 벗어나 하단으로 떨어지면서 허공을 물방울처럼 날았다.
그대로 모든 것은 끝났다.
중단과 하단이 맞닿은 빙벽 위에 그가 마지막 제동을 위해 휘두른 피켈만이 얼음을 뚫고 토왕폭에 굳게 박혔다. 석주와의 굳은 약속처럼 굳건한 모습으로….
지금 그는 석주와 함께 노루목에 묻혀 있다. 요델산악회에서는 석주의 영전에 바치기 위해 토왕폭 등정에 도전한 송준호를 석주 무덤 바로 곁에 묻어주었다.
이들 세명의 묘지에 세워진 충혼비에는 시간과 존재의 불협화음으로 공간을 활보하고 있는 악우들이여! 철학적 경이로써 모둠된 그대들의 자취는 훗날 이 인자한 산정을 찾는 이들의 교훈이 될 것이다.
추억을 침묵으로 승화시킨 사람들의 그 대담한 의지로 그대들은 설악에서 회생하리라라고 새겨져 있다.
1973년 1월 2일 새벽.
송준호의 작별인사는 서울에 있는 연인의 꿈 속에 나타났다. 그는 그녀를 까만돌이라고 불렀다.
연인 송준호가 토왕폭을 등반하다 떨어지는 꿈을 꾼 까만돌은 혼비백산해 깨어났다. 송준호는 토왕폭으로 떠나며 그녀에게 1월 5일 오후 2시 중앙극장 앞에서 만나자고 했었다.
당시 중앙극장에서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상영 중이었다.
그 영화를 함께 보자던 송준호는 자신이 설악산 토왕폭에서 바람처럼 사라지며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송준호는 그 뒤에도 그녀의 꿈에 거듭 나타났다. 꿈 속에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보라고 여러번 보챘다.
그 바람에 영화를 보러간 그녀는 스크린을 통해 "영화의 주인공 스칼렛 오하라처럼 굳건하게 살아가라"는 송준호의 메시지를 보았다. 73년 가을, 요델산악회는 송준호 추모등반을 설악산 용아장성에서 갖고 용아장성의 14번째 암봉에 그의 추모동판을 새겼다.
토왕폭 초등(初登)을 성공하면 스위스에서 등산학교를 다닌 뒤 직업가이드가 되자는 계획을 세웠고, 신혼여행으로 석주길을 등반하기로 약속했던 그가 아니었던가.
까만돌은 추모동판 뒤에 송준호에게 보내는 연서를 썼다.
"…그대 뜻대로 스칼렛 오하라처럼 살아가리라…"
송준호의 1주기인 1974년 1월 2일. 송준호의 연인이었던 '까만 돌'은 한 남자와 노루목의 '석주 무덤' 곁에 누워 있는 송준호를 찾았다. 송준호의 묘에 두 번 절한 그 남자는 노루목을 굽어보고 있는 하얀 토왕폭을 바라보며 송준호에게 산친구로서 약속을 했다.
'그대 뜻대로 까만 돌이 살아가도록 평생을 보살피겠소.'
그는 송준호와 절친한 동양산악회 소속 산꾼이었고, 농대 출신의 젊은 '상록수'였다. 까만 돌과 상록수는 결혼했다. 상록수는 결혼 후 고향인 전북 장수로 내려가 어릴 적 꿈인 목장을 만들었다.
스칼렛 오하라를 닮은 까만 돌과 상록수의 집념으로 자그마하던 목장이 5만여평으로 커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토왕폭과 까만 돌과 젊은 상록수, 그리고 송준호의 그 절절한 설악산 사랑은 내 가슴까지 뜨겁게 달궈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옛날 어느 산에 폭포가 하나 있었어. 그 폭포는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높고 곧은 폭포였지. 그 폭포가 얼마나 높은지, 또 언제부터 언제까지 떨어지는지 아무도 몰랐어. 그런데 그것을 아는 이가 한 사람 있었어. 그는 노래꾼이었는데 성은 김이었고, 이름은 수영이라 했지. 그의 노래 한번 들어봐.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한 정신처럼 쉴 새 없이 떨어진다. 금잔화도 인가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소리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그런데 말이야, 곧은 소리를 내며 곧게 떨어지던 그 폭포가 어느 겨울날 얼어붙은 후 풀리지 않았어. 계절을 잃은 그 폭포는 더 이상 노래하지 않았던 게야. 얼마나 답답했겠어. 폭포나 보는 사람이나 말이야.
그래도 다들 편히 잠자고 있을 때 곧은 폭포소리를 못내 그리워하던 한 소년이 폭포를 풀려고 하얗게 얼어 붙은 폭포에 올라간 게야. 미끄러져도 오르고 떨어져도 오르고 올라 소년은 폭포의 언 얼굴에 매달렸어.
그는 맨주먹으로 차가운 얼음덩어리를 두들겼어. '폭포야 풀려라. 한을 풀어라'하고 마구 두드린거야. 두드리다 두드리다 두 주먹이 핏빛으로 멍들었어. 이제는 풀릴 만도 하겠건만 폭포는 그래도 움직이지 않았어. 폭포는 가슴마저 얼어붙은 거야.
그러다, 그러다가 말이야. 폭포는 문득 이렇게 웅얼거리기 시작했어.
'네 머리로 여기를…'.
소년은 결국 폭포를 푸는 열쇠 구멍에 제 머리와 몸을 던져버린 거야. 그래서 폭포는 계절과 밤낮을 되찾고 다시 곧은 소리를 내며 소리치기 시작했어. 동해에서 치솟은 맑은 햇살이 폭포를 비출 때면, 지금도 그 소년의 붉은 피가 폭포수로 변해 절벽의 폭포를 곧게 곧게 떨어뜨리고 있지.
그러다 겨울이 오면 폭포는 하얀 얼음으로 소년의 넋을 설악의 하얀 신화로 다시 결정시키곤 하는 게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