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일(49)교수 경부달리기 ...국제신문(펌)기사
3,115
박선화(48)
2005.11.22 22:52
박태일(49)교수 경부달리기 ...국제신문(펌)기사
글쓴이 박선화(48) [ 1210tiger@hanmail.net ] / 2005-11-22
[아침숲길] 가을을 몰고 달리는 남자들 /박태일
가을을 떠밀고 달린다. 모자를 썼는가 하면 짧은 바지 차림이다. 울긋불긋 온몸을 붉히고 바람을 앞세웠다. 마을을 지나고 고개를 오른다. 도심을 지르고 호수를 낀다. 가을도 발을 맞추고 목청을 함께 모으며 달리는 가을이 있다니. 땀을 닦는 달림이. 응원하는 도우미들 박수소리도 드높다. 서른 명이었다가 스무 명으로 줄기도 한다. 두 줄이었다가 세 줄로 이어지기도 한다.
줄기차게 북에서 남으로, 서울에서 부산까지 400㎞가 넘는 거리의 가을을 몰고 내닫는 한 무리 남자들이다. 그들이 서울을 출발한 때는 9월24일이었다. 이미 천안·대전·김천을 거쳤다. 11월20일에는 고령·창녕을 지나 밀양까지 닿았다.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마라톤 행사 이야기다. 제3회 서울부산이어달리기(공식 일컬음은 경부이어달리기)가 그것이다. 두 해 전부터 동호회 차원에서 시작한 행사다. 그러나 지닌 뜻은 가볍지 않다. 이른바 '노다이(乃台)사건', 곧 '부산항왜학생의거'를 기리기 위한 뜻이다. 1940년 11월23일 부산공설운동장에서 일어났던 '제2회 경남학도전력증강국방경기대회'가 그 빌미였다. 제국주의 식민자들이 '국민정신총동원'에서 나아가 '국민총력' 책략을 펼 무렵이다. 학생에 대한 인력 수탈도 거셌다.
학생들의 '전시 동원' 역량을 키우기 위해 낸 꾀 가운데 하나가 이른바 '학도전력증강국방경기대회'였다. 대회 당일 '내태(乃台·노다이)' 대좌를 중심으로 한 왜인 심판관들은 제1회 대회 우승교였던 동래중학교(현 동래고)의 우승을 막기 위해 갖은 술책을 부렸다. 경기 내내 불리한 판정에다 트집을 잡고 승부를 조작했다. 우승이 왜인 학교로 넘어가게 된 것은 예정된 순서였다. 참고 있었던 우리 학생들의 울분은 마침내 폐회식에서 폭발하였다. 부산제이상업학교(부산상고·현 개성고) 학생들이 힘을 모았다. 왜인 교사와 심판관에게 욕설을 퍼붓고 고함을 질렀다. 혼비백산 내빼기 바쁜 그들이었다. 두 학교 학생들은 운동장 앞에 모여 행진을 시작했다. 영주동 내태 대좌의 집을 습격했다. 밤늦게까지 부산 중심가를 행진하며 의분을 토했다.
승부 조작과 차별에 대한 울분은 의거의 겉일 따름이다. 경술국치부터 서른 해에 걸쳐 이어져 온 민족 억압과 지역 수탈에 대한 의분이 그 속이었다. 젊은 학생들의 몸과 마음을 빌려 그것이 고스란히 솟구친 것이다. 광주학생의거를 이어받은 대표적인 학생의거가 부산항왜학생의거다. 나라 잃은 시대에 마지막까지 민족 정기가 끊이지 않았음을 보여준 대규모 의열 활동이었다.
지역마다 명문교가 있다. 인재를 꾸준히 키워내 지역 발전에 이바지한 바가 남다른 학교다. 아울러 그 동문은 지역으로부터 많은 혜택을 입기도 한다. 지역에 대한 책임 또한 크다는 뜻이다. 부산은 특정 명문교의 뜻이 묽은 거대도시로 바뀐 지 오래다.
동래고나 개성고는 나라 안에서도 드물게 개교 100년을 훌쩍 넘긴 명문교다. 두 곳 모두 뿌리는 지역의 민족사학에 있다. 그 동문들이 마련한 달리기 행사라 뜻이 새삼스럽다. 달림이의 면모도 다채롭다. 40, 50대 장년이 중심이다. 하지만 30대부터 70대까지 몸을 아끼지 않는다. 한 세대를 뛰어 넘는 나이의 동문들이 한 마음으로 발을 맞추며 가을 길을 달리고 있는 셈이다.
세월의 속도에 밀리고 풍속에 차이며 살아왔을 그들이다. 하는 일과 생각이 죄 다를 이들이다. 돌아가면 어깨 무거울 한 집안의 가장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마냥 즐겁다. 홍안의 호연지기를 새로 배운다. 본디 남자는 달리는 사냥꾼의 전통을 이어받는다 했던가. 지난 석 달 주말을 틈타 서울 부산 천리 길을 몰고 오는 사람들이 있다. 야성으로 빛나는 가을 사냥꾼들이다.
11월26일 김해를 거쳐 27일 아침에 그들은 부산 도심으로 들어설 예정이다. 먼길을 밀어주며 함께 달렸다. 서면에서부터 둘로 나뉘어 모교로 향할 것이다. 개성고 달림이는 당감동 교정이 목표다. 동래고 달림이는 망월대 아래로 향할 것이다. 새로운 지역 축제로 나아가기 위한 디딤돌은 놓였다. 해마다 남하하는 우리나라 맑은 가을과 함께 번성할 것을 믿자.
/시인·경남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