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향(山香)-산행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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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곤(36)
2006.09.07 13:17
제479차 망월산악회 정기산행
36회 산행참가자 - 김 철, 김진곤, 남상기, 문은조, 문 정, 박수근 총: 6명
산향(山香) - 김 진 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다.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지만 그래도 어김없이 저 산모퉁이에선가 가을이 걸어오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자연에서 나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편안하다. 계절의 변화는 있는 모습 그대로 다가와 귀를 열어주고 찌들어진 영혼들을 흔들어 빈 마음을 가득 채워 준다. 가끔 오르는 산이지만 철 따라 변하고 어제와 오늘이 같지 않으니 싫증이 나지 않는다.
구름 한점 없는 맑은 9월, 호남의 내금강 선운산은 이름만큼 골이 깊고 물이 맑아 울창한 나무들의 너른 품속으로 걸어가고 싶은 곳이다. 나무 등걸에 이끼가 무성하고 습지에 웃자란 풀잎들이 버거워하는 바람소리만 일렁일 뿐 가을은 멀리 있는 듯하다. 산사의 풍경소리를 들으며 그리움 정점에서 멈춰선 붉은 꽃봉오리가 있는 도솔천의 꽃, 일명 상사꽃 무릇은 애타는 그리움으로 불태우고 있다.
지난 일요일, 오래간만에 옛 교우들이 선후배 동문들과 함께 선운산으로 산행을 하는 날이다. 선운사입구 주차장에서 산봉우리를 쳐다보니 초가을의 향기가 마음을 열어 손님을 맞는다. 이곳을 출발점으로 경수산, 마이재, 선운산, 개이빨산, 천마봉, 도솔암, 자연의집, 선운사로 이어지는 5시간 30분의 산행이다. 경수봉으로 가는 한적한 농촌들녘에는 벼가 알알이 익어가고 계곡을 따라 산의 초록향기가 넘실대는 길을 선두가 잡는다.
산을 오른다. 긴 줄로 늘어선 동문들이 내딛는 길섶에는 풀냄새로 엉킨 단내가 코끝에 묻어난다. 올해는 유달리 더운 탓일까 햇볕이 땅의 열기로 따갑다. 10여분 가파른 길을 오르니 숨이 차다. 이미 수많은 발길이 오고간 다듬어진 길이다. 이 세상 더러운 먼지와 욕심으로 채워졌던 숨길을 다 토해내고 체가름 하여 산속의 맑은 기운으로 가슴을 채운다. 키 큰 떡갈나무 잎새가 흩뿌리는 햇살에 간지럽고 드문드문 만나는 알싸한 솔잎냄새가 좋다.
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경건한 마음으로 참선하는 도량이며 사색의 장소이다. 나를 찾기 위한 곳이며 적나라하게 보고 느낄 수 있는 생각의 길이다. 가파른 산 비탈길을 오르며 어려움을, 언덕에 올라 발아래 조아리는 낮은 산봉우리와 초록 숲을 내려다보며 성취감을 맞본다. 자연을 통해 오만하지 않고 겸손해야 됨을 배운다. 이 얼마나 많은 가르침을 주는 스승인가.
오솔길에 취해 30여분 오르니 경수봉이 보인다. 갈림길에서 살짝 비켜 마이재로 향한다. 선후배들이 길을 오르며 번갈아 주고받는 이야기가 흐르는 물처럼 돌돌 구른다. 세월 앞에 장사(壯士) 없다드니 나이 탓인가 온 몸으로 타고내리는 땀이 옷을 적신다.
잠시 쉰다. 진한 초록잎과 군데군데 예쁘게 핀 야생화와 나누는 말없는 대화, 찾아온 손님이 도시의 묻은 때를 털어내고 산 향기에 취해 한그루의 나무가되어 본다. 깊은 수양(修養)을 하지 못해 낙낙장송(洛洛長松)은 될 수없고 그렇다고 두 팔 벌린 낙엽송도 더욱 아니다. 그저 숯으로나마 있기를 바라는 굴참나무 정도는 되지 싶어 위안을 한다.
다시 산행을 재촉한다. 해를 가린 숲을 헤치고 10여분 흘렀을까 마이재에서 왼쪽으로 꺾어 석상암과 선운사로 가는 B코스로 접어든다. 걸으면서 털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옛 교우라면 나직이 담소할 여유가 생긴다. 요즘 바다 이야기가 화제다. 푸른 바다 내음이 바람을 타고 산을 넘고 계곡을 따라 녹음을 만나기도 하지만 때로는 큰 바람을 만나 세상을 어지럽게 뒤집어 놓는다.
원래 바다는 행복한 이야기로 사람에게 신비스럽고 무한한 원초적인 관념을 우리에게 심어 주었다. 이처럼 희망의 이야기가 가끔 사행성 게임으로 변질하였다. 게임 중 제로섬은 그 어원에서 손해를 보는 자도 이익을 보는 자도 없다는 뜻이다. 다만 게임을 통해 즐거움을 얻으면 된다. 그러나 요즘 바다이야기는 이익보다는 손해가 더 많다. 부질없이 달려들어 허둥대는 사행성 게임은 이제 없어야 하겠다.
산사(山寺)로 들어선다. 여기서 히에로파니[Hierophanie 성현(聖顯)] 공간인 부처님의 세계임을 알리고 속세의 티끌을 개울물에 씻고 체가름 하여 들라한다. 사천왕문을 지나 선운사 큰 법당에 들려 부처님께 삼배하고 서야 부처님의 향훈을 접할 수 있다.
동백나무로 감싸인 고찰 선운사는 일가붙이처럼 올망졸망 암자들을 거느리고 있다. 도솔암, 참당암, 석상암, 동운암 등이 산자락에 있다. 천년의 풍마우세(風磨雨洗)가 배흘림기둥을 갈기갈기 트게 만들었다. 은은한 예불소리가 들리고 천년을 사른 향이 경내를 감돈다. 영겁(永劫)은 한순간 한순간이 점찍어 온 것, 그 한순간 속에 내가 서 있다. 숲속에서 산새소리와 물소리가 합창을 하고 천년을 흘러온 약수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니 마음이 편안하다.
산사(山寺)를 나오니 억만년 보듬었던 물을 놓아 보낸다. 흐르는 계곡물이 어느 고승의 은은한 독경처럼 들린다. 숱한 세월을 그랬듯이 가다가 스며들어 생명의 꽃을 피우도록 베풀 것이다. 계곡물이 자꾸자꾸 나를 따라 온다. 내가 그들을 따라 가는 것일까. 다시 속세에 접어드니 산사의 멱까지 산나물을 파는 아낙네들이 줄지어 앉아 있다. 시끄러운 등산로, 만나는 사람들로 세상이 어지럽다.
오늘 따라 선운산 정상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와 있다.
2006. 9. 7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