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고구려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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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28 박선화(48) 2007.05.26 15:12
동경 고구려 신사 방문기 작성자 박선화(48) 동경 고구려 신사 방문기 -성도고등학교 교사 박선화(48회) #. 일본어 교사 동경 신주쿠 분카 여자대학 심화연수(1개월) 중 쓴 글입니다. #. 동경에 가면 고구려 신사를 꼭 다녀오십시오. 2007년 1월 29일. 월. 맑음 4교시 수업을 마치고 늦은 시간이지만 사이타마현 高麗郡 Komagawa 신사를 찾아갔다. 1300여 년 전 고구려 왕조가 무너지고 유민들이 여러 곳으로 나뉘어져서 발해, 몽골, 신라 등 이동이 많던 때에 일본으로 건너 온 이 지역 사람들 1799명을 모아 716년 고구려마을을 만들었던 곳이다. 若光이라는 고구려 왕족이 이 지역을 다스렸다고 하는데 후에 신사를 지어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으며 현재 약광왕의 60대 직계 후손이 신사를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벼슬길에 오르고자 하는 사람이 이곳을 참배하면 꼭 원하는 벼슬을 얻었다고 한다. 왕인 박사 후손들이 개척했다는 아사쿠사에서 1시간 정도 JR 川越(카와고에)線 지하철로 이어지는 열차를 두 번 갈아타고 고려천역(코마가와역)에 내려서 약 1km 정도 가면 신사가 나온다. 앞에 高麗川이라는 작은 강이 흐르고 신사로 가는 강 다리에는 出世橋, 高麗門 등의 다리 이름이 붙어 있다. 고려신사에서 남쪽으로 4km쯤 내려가면 지하철 西武池袋(세이부 이케부쿠로)線의 高麗(코마)역이 나온다. 고려역 주변을 高麗 本鄕이라고 하고 高麗驛과 200m 거리에 구석기시대 주거지가 나온다. 고려역의 동쪽 고려천은 완전한 원형으로 흘러가는데 물이 휘돌아 감은 섬과 같은 곳을 巾着 평야라고 하는데 이곳에서 일본 최초로 한국식 논농사가 시작 되었다고 하는데 한국 안동 하회 마을을 연상하게 한다. 이 지방은 高麗小學校, 高麗中學校, 高麗고개, 高麗警察署 등 모두 高麗라는 명칭으로 불리어 지고 있다. 이곳은 석기시대 이후 줄곧 고구려의 텃밭인 ‘고대 코리아타운’이라고 할 수 있다. 겨울인데다 늦게 오다보니 신사에 닿자 곧 어두워졌다. 중문을 들어서면 많은 나무판에 직함과 이름을 새긴 방문 인사들의 작은 패를 걸어둔 곳이 있다. 사물놀이 김덕수, 한일회담 대표 허정, 공노명, 최규하 주일 대사, 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 최린, 초대 내무부 장관 공화당 의장 윤치영, 고려대 총장 김준엽, 등 낯익은 한국인들의 이름도 걸려 있다. 신사 뜰에는 많은 사람들이 기증한 나무와 헌수 푯말이 늘어섰는데 한국 사람도 무척 많다. 동경 한국 학교 교장, 이사장, 김종필 전 총리, 몇 사람의 주일 대사............ 이 사람들의 기념식수가 출세욕이 아니었기를 바라면서 신사참배를 하였다. 일본 신사에 절해 본 적이 없지만 이곳은 내 조상이니 고개를 깊이 숙여 세 번 절하고 엄숙하게 우리 국운을 크게 융성하게 해 주시기를 빌었다. 가슴이 뭉클하다. 몰락한 왕조를 떠나 이국땅에 정착했던 조상들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더 마음을 쓰리게 하는 나무 두 그루, 조선왕조 마지막 황태자 李垠(1970년 별세) 전하부부의 기념식수이다. 무척 키가 크게 잘 자라서 사람은 갔으되 그 심은 나무를 만나니 감개무량하다. 이 나무가 어릴 때 황태자의 손길이 닿았을 것을 생각하니 정이 불쑥 솟는다. 어둠 속에 자동셔터를 해놓고 헌수 푯말에 뺨을 대어본다. 나무를 가슴에 품어 보면서 옆의 방자(나시모또 노미야 마사코)여사의 나무는 곧게 잘 자랐는데 약간 휘고 뒤쪽에 흠집이 크게 나 있어서 李垠 황태자의 찢긴 마음을 보는 것처럼 눈시울이 시큰하다. 일본인들의 나쁜 시기심이 나무에마저 흔적을 남겼구나. 1995년 광복50주년 기념 백두산 여행길에서 만주 땅 용정, 중국동포 안내원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독립 운동가들이 즐겨 부르던 노래 ‘선구자’ 노랫말 속 ‘꿈의 표상이던 소나무에 아무도 모르게 일본인들이 석유를 부어 말라 죽게 했다’는 것이다. 한국인의 기를 자르기 위해 다이너마이트로 반 토막을 냈다는 설악산 흔들바위 받침의 거대한 암석, 덕수궁 중화전 용상 뒷벽의 일월도 그림, 해를 상징하는 그림 위에 해와 똑같은 모양의 백동 철판에 바탕색과 같은 색을 칠해서 가는 실로 달아 놓았는데 멀리서 보면 일월도의 해가 안보이게 된다. 1970년대 덕수궁 수리를 하면서 찾아냈던 일, 전국 각지의 조선의 기를 자르는 쇠말뚝... 철저하게 조선인의 정신을 분해하려는 일본인들의 간교한 술책은, 끝내 고종과 생모 엄비 사이에 태어난 李垠 황태자가 심은 이 나무마저도 수난의 흔적을 안은 채 잘 자라있다. 왕조의 혈통을 이을 李垠 황태자의 첫아들(이름 진)을 할아버지 순종(명성황후 민비의 아들)이 보고 싶어 한다고 하여 우여곡절 끝에 일본에서 조선 왕실로 데려왔는데, 간교한 그들의 손길은 끝내 그 황태자의 생후 8개월 된 아이를 이 땅에서 죽게 하였다. 어느 궁녀가 먹인 우유를 먹고 다음날 죽었는데 그 궁녀는 그날 이후 찾을 길 없이 되어 버렸다고 한다. 정략결혼의 고리가 되어 무너진 왕조의 인질이 된 일본육군사관생도 李垠 황태자의 아내가 된 방자여사, 다시 둘째 아들 황세손 李玖를 낳았다. 미국 MIT 공대 건축과를 졸업했던 李玖는 1963년 아버지 李垠과 함께 한국에 왔으나 다시 일본으로 간다. 李玖는 황실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했던 미국 여인 쥴리아나와 이혼하고 자신이 태어났던 저택이 있던 곳에 지어진 동경 아카사카의 프린스 호텔 화장실에서 2005년 7월 16일 74세의 나이로 후사 없이 변사하였다. 방자 여사(1989년 별세)는 자신이 낳은 첫 아들을 저 세상으로 떠나보낸 채 여기 슬픈 이야기를 숨기고 나무 한 그루를 남겨 놓았다. 저들의 천황은 만세일계라고 하나 조선왕조는 이렇게 끝을 맺었다. 지난해 신문에 조선 황족회라는 곳에서 돌아가신 李玖 황세손이 후사 없이 돌아가심에 가장 혈통이 가까운 90살이 넘은 덕혜 옹주라는 사람으로 어느 호텔에서 황제 즉위식을 치르게 되어 신문에 나온 것을 본 일이 있다. 뭔가 생각해 볼 일이다. 실제 일본 황실이라고는 하지만 막부시대의 황실이란 이름만 있었을 뿐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몽고 지역에서 징키스칸의 이름은 그들의 큰 희망인 것과 같이 혈통과 정통성이란 보이지 않는 큰 힘이 될 것이다. 대한 제국 황제 즉위식에 대해 인터넷에 부정적인 댓글이 쏟아졌지만 2차 대전 패전 후 히로히토의 인간 선언 등은 얼마나 일본의 자긍심을 상하게 하였던가? 본시 점령군인 미국은 일본에서 천황제도를 없애려고 생각하고 천황에게 전쟁의 책임을 물어 폐하려고 하였으나 일본 통치에 잘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다고 생각을 바꾸었다고 한다. 조선 왕조의 개창 자체가 문제가 되겠으나 500년 전 잘못 채워진 단추를 지금 바로 잡기는 불가능하다. 지혜롭게 일을 푸는 일은 이미 그 혈통이 확인되는 바 조선왕실을 유지시키면서 기본적인 정치는 그대로 이어가면 될 일이다. 지금 내가 있는 것처럼 조선 왕실의 후손도 있는 것이다. 자존심 회복의 단계적인 일이 될 것이다. 자존심이란 만들어지는 것이지 열등감에만 사로잡혀 자기비하에만 열중하면 생겨날 수가 없다. 어두운 高麗신사 곳곳에 가로등이 있고 건물마다 센서가 붙은 전등이 있어 다가가면 불이 자동으로 켜진다. 나오다가 李垠 황태자가 심은 나무를 다시 찾아가 길게 찢어져 상처가 난 곳을 만져 보았다. 본래 이 종류의 나무는 곧게 크는 것이지 배가 조금 나온 모습은 아니다. 독립된 내 나라에 옛 왕실의 혈통을 찾아 재건하는 일은 한 집안의 족보를 찾는 것과 같다. 입장료 300엔이 드는 신사 바로 앞의 성천원 절은 밤이라서 들어가지 못했다. 이 절은 약광 왕을 위해 지어진 것인데, 약광왕의 묘가 있고 묘 앞에는 김수로 왕릉의 파사 석탑 모양의 돌을 쌓아 올린 탑과 단군을 모시는 제단도 있다고 한다. 전형적인 한국 마을이다. 배산 임수의 명당에 그 옛날 고구려인들이 터를 잡았던 곳이다. 앞에 공터에 작은 공동묘지가 있고 경사진 길을 올라 高麗川 역으로 갔다. 나오는 길에 마트에 들르니 고구려 조상신이 도와주었는지 저녁 도시락 50%세일이 있어 천엔짜리 오백엔을 주고 사서 기차에 앉아 모처럼 백엔짜리 전자렌지용 쌀밥(한 달간 포장 햇반 만 먹고 체중 3kg 줄었음)이 아닌 비싼 일본 도시락으로 배부르게 식사를 하였다. 슬픈 역사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힘을 기를 일이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조선에 인재 없음을 탓하지 말고 스스로가 인재가 되라고 하였다. 물자를 아껴 쓰고 몸과 마음을 튼튼히 갈고 닦아 강인한 인재로 거듭나야 할 일이다. 오늘 남과 북에서 휴전선을 넘어 반세기 동안 잘린 민족의 허리가 아주 조금 풀린 뜻 깊은 날에 글을 마무리하였다. 감개무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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