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삼협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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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화(48)
2006.12.25 02:49
2. 장강 삼협 답사기 성도고등학교 박선화
2006. 8. 11. 금. 맑음, 오후 소나기
돌아갈 가방을 챙기고, 아침 식사로 빵 몇 개를 먹었다. 한 달에 40元에 빌렸던 자전거를 반납하고 보증금 90元을 돌려받았다. 박향림 선생님 여행가이드 책에서 중경지방을 복사한 후, 부재중인 류성춘 장학사님 방에 메모를 남기고 택시로 약 20분 정도 북경서역에 오니 요금이 41元 나온다. 주말이라 기차표는 침대, 좌석 모두 없어서 238元을 주고 북경에서 2087km 떨어진 중경까지 입석표 한 장을 끊었다. 3시간 쯤 남았다.
일반 좌석실에는 짐을 정리하는 승무원, 젊은 남자들이 조그만 발받침 양탄자 조각을 걸상에 얹고 구두를 신은 채 올라가서 짐을 가지런히 정리한다. 여자승무원이 10호차가 식당차인데 가서 그냥 앉아 있다가 나중에 야식이 나오면 30元내면 10시부터 아침 6시까지 앉아 있을 수 있다고 친절하게 안내해 준다. 식당차에 가서 고기요리 매운 것을 시켰는데 23元이고, 밥 1元, 젓가락 1元이다. 민물고기 같은데 가장 맵다는 표시로 까만색 별 3개가 요리 이름 앞에 붙어 있다.
기름이 너무 많아서 고기만 건져 먹고 밥을 덤으로 더 가져다주어서 더 먹었다. 앞자리에 앉은 젊은이가 重庚 지방 얘기를 해주고 長江 三峽을 가는 방법, 빨리 가는 배는 20시간 정도 걸린다고 한다. 15일까지 돌아가야 하니까 14일 낮 12시 기차를 타면 다음날 13시 북경 도착이다. 야식은 커피 한 잔, 빵과 간식이 나온다. 그냥 자리 값으로 30元을 받는 것 같다.
옆 사람이 자기는 북한의 평양, 개성을 2004년에 다녀왔으며 歷史가 전공이라고 한다. 신문을 가리키면서 일본의 신사참배 기사를 보고 일본 욕을 하며 ‘고이즈미’ 이름에 볼펜으로 가위표를 한다.
독도 얘기, 초대 대통령 이승만, 기타 歷史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원래 한국은 ‘고려’였고 ‘고구려’에서 나온 말이다. 한국의 영어이름 Korea도 고려에서 나왔다고 설명한다. 중국 지도를 내 놓으니 ‘釣魚島’를 일본인들이 자기 것이라고 한다면서 ‘大馬島’를 가리키며 이것이 ‘獨島’ 아니냐고 한다. 지형에는 부정확하지만 논리 정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고구려사를 소수 민족의 역사로 왜곡을 하는 동북공정에 한국 측의 강력한 항의가 있어야 할 것 같다. 흑룡강성 출신의 재중동포 청년 김희성씨도 ‘왜 한국정부나 국민들이 고구려사 문제를 강력히 항의하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모든 중국인들이 고구려는 한국인의 조상이며 한국의 고대 역사라고 인정하는 사실을 중국정부가 동북 공정을 강행하며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흡사 일제 강제 점령기에 일본인들이 ‘조선은 본시부터 없었던 나라’라는 것을 강조하던 식민사관, 제국주의 망령이 되살아나는 느낌이다. 발가락을 잘라 먹겠다는 것은 몸통을 탐낸다는 뜻이다. 옆자리 중국남자는 약간 술을 먹었는데, 압록강에서부터 중국 국경을 손가락으로 짚어 나가면서 내몽고를 거쳐 국경을 따라 가다가 ‘외몽고도 원래 중국 땅인데 스타린이 못 들어오게 해서 못 갔다.’ ‘원래는 중국 땅이다.’ 하고 강하게 말한다.
한국정부는 필요한 말은 해 둘 필요가 있다. 외교적 마찰이니 뭐니 하면서 나의 할 말을 못하는 것은 못난 정부일 뿐이다. 정부 관리는 자기가 어떤 일을 하는데 ‘외교적 마찰’ ‘경제마찰’등의 용어를 써가며 국가대계를 흩트리는 일을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정치하기 힘들어도 할 말은 해야 한다. 북경에서 파는 모든 중국지도에는 한국의 東海를 일본해로 표기하고 있다. 그런데 중국동부의 바다도 東海로 표기되어 있다. 이런 경우에 중국에게 한국의 동쪽 바다를 똑같이 東海로 표기하라는 말은 문제가 있다. 중국에서 보면 대륙의 동쪽 바다이니까 東海가 가능하지만 한국의 東海는 바로 일본의 西海가 된다. 東海이름 찾기 보다는 당장 객관성이 확보되는 명칭이 더 타당할 것이다.
언젠가 어떤 지도에서 Korea Japan see 라고 표기 한 것을 보았다. 타당한 표현인 것 같다. 한․일해가 좋을 듯싶다. 한국해도 좋지만 일본해를 쓰는 곳이 있으니 바로 충돌이 된다. 지도상의 일본해를 한국해로 볼펜으로 고쳤지만 지도 출판사에 강력히 고쳐달라고 건의해야할 일이다. 중국의 한국 유학생들이 거의 모두 이런 표기의 지도에 무감각하다. 아마 지도 출판사에 일본의 손길이 닿았을 것이다. 나 자신도 그 출판사를 알아보지 않았다.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말이나 글로 끝날 일은 아닌 것 같다.
2006. 8. 12. 금 맑음
새벽 5시 10분 식당좌석에 잠들어 있는데 남자승무원이 깨워서 가보니까 침대자리가 하나 나왔다고 하여 90元을 주고 上段을 끊어서 갔다. 5시 20분 부산 집에 전화하였다. 3단의 맨 위쪽 침대칸은 머리를 들고 앉을 수 없지만 누워 자는 데는 좋았다. 엄청 편하다. 9시까지 계속 잤다. 복도 1인용 좌석에서 오렌지를 먹고 있는데 옆 사람이 일본인이냐고 물어서 한국인이라고 답하니 자기의 삼성 휴대폰을 보여 주며 싱긋 웃는다.
그 사람도 일본의 신사참배, 독도 등의 얘기를 한다. 역사란 힘 있는 나라만이 쓸 수 있는 것이기에 지금 일본은 자신의 힘에 맞는 역사를 쓰려고 이전의 역사를 왜곡, 부정하는 것이다. 安康역에서 같이 얘기하던 사람이 내리면서 내게 배운 한국말 인사로 ‘안네히 가세요‘하고 내렸다. 잠깐 정차하는 동안 기차 옆 수레에 각종 먹거리를 파는 세 사람이 왔다. 빵1개 2元 쌀밥과 반찬 3가지 한 도시락 5元 계란간장 절인 것 2개를 2元에 사서 차에 올라서 복도 작은 탁자에서 먹었다. 安康은 西安 바로 아래쪽의 도시이다.
수많은 터널을 지나고 산지가 이어지며 드문드문 산 사이에 2, 3층 건물이 많이 보이고 , 安康시에는 10층 정도의 아파트가 많이 보인다. 중국 남자들은 거의 모두 담배를 핀다. 기차가 떠날 때 차창에 비가 뿌렸는데 지금은 맑다. 산중호수가 펼쳐지는데 아마 댐이 있나보다. 각 방에는 액정 TV가 한대씩 설치되어 서양 영화를 상영하고 있다. 침대차는 에어컨도 적당하여 지상 낙원이라는 생각이 든다. 밖은 덥다. 각 차량마다 승무원이 한 사람씩 배치되어 관리한다.
침대차에 타면 표를 받아서 파일에 챙겨놓고 작은 번호표로 바꾸어 준다. 내릴 때 차표로 교환하지 않으면 내릴 수 없다. 大米溪라는 작은 역을 지나면서 바로 옆으로 계속 호수가 이어지다가 지난번 역에서 나뉘어져 가는 철도는 계곡 호수를 가로 지르는 엄청나게 높은 철교를 지나 건너갔다.
붉은 작은 벽돌집, 지붕을 돌로 이은 집들이 산 계곡 사이에 나타난다. 터널이 벗어나는 틈사이 계곡마다 어김없이 몇 채씩의 집과 마을이 강을 따라가며 이어진다. 무척 높은 곳에 철도를 만들었다. 같은 방의 조그만 남자아이가 TV에서 CM송으로 나오는 大長今 연속극 노래 가사를 따라 부른다. 놀라운 일이다. 산골을 지나는 조그만 역에서 사람들이 기차를 기다리고 있다.
한국에서 나온 여행안내 책자 복사물을 찾아보았으나 重庚 臨時政府 遺址에 대한 안내가 전혀 없다. 유감이다.
중경 도착하여 다시 알아보아야겠다. 이 험준한 길을 임시정부를 짊어지고 오던 나라 잃은 김구선생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까마득히 아래 계곡 밑에 구불구불한 신작로와 마을들이 있고 높은 산의 중허리를 가로질러가는 철도가 이채롭다.
이 산골마을에 지붕위의 원판형 위성안테나는 중국의 발전상의 일부인 듯 느껴진다. 작은 松村波역을 지나고, 巴山站은 작은 역이지만 현대식의 특이한 건물이다. 官渡 역을 지나 萬源역에 잠시 정차한다. 계속 공사현장들이 이어진다.
복도를 지나가는 수레에서 도시락 15元에 샀다. 점심 식사 중 맞은편 젊은이가 삼성카메라를 꺼내어 사진들을 살펴본다. 내 것도 삼성이라고 하니까 활짝 웃는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차병을 갖고 다니면서 기차에 있는 뜨거운 물 나오는 곳에서 물을 부어 차를 마시고, 컵라면도 이렇게 먹는다.
중국의 변화는 정말 눈부시다. 이들은 이 모든 문화 확산을 철도를 통해 이루고 있다. 또한 변방 이민족을 支那라는 틀 속에 넣고 독립의 의지를 꺾어 버리는 것도 철도의 역할이다.
진정한 티베트가 사라지게 되는 4천km가 넘는 靑藏철도의 개통....... 25시간을 달리면 북경의 문물이 重庚에 닿게 된다. 산골마을은 옛 모습과 관습을 갖고 있으면서 위성 방송을 보고 있다.
어쩌면 맑고 고은 자연 속에서 선진국 보다 더 큰 혜택을 누리는지 모르겠다. 가장 많은 사람이 이용하는 좀 늦은 철도는 약 33시간이 걸린다. 2087km의 거리다. 花樓縣 역,
중국인들은 말도 실리적이고 식사도 실리적으로 하는 것 같다. 언어에도 식사에도 격식이 없다. 필요한 부분만 하면 된다. 계곡 강마다 골재채취가 많은 것은 중국의 발전을 보는 것 같다. 간혹 산골물이 맑지 못 한 곳은 어김없이 공장이 있다. 발전과 공해가 같이 맞물려 간다. 지금의 발전이 나중에 환경비용으로 더 많이 지불하게 될지라도 지금은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각자 업무가 있고 업무상의 직계는 있지만 상하 종속관계는 아니다. 그냥 주어진 자기 일에 충실할 뿐이다. 정치 체제가 무엇이든 문제되지 않는다. 멀리 계곡물에 두 사람이 낚싯대를 물에 담근 채 서있다.
계곡을 가로지르는 와이어로프의 출렁다리들은 아마도 문명으로 가는 유일한 통로일지도 모른다. 인간에게 가장 큰 형벌은 권태라고 하였다. 여행의 즐거움은 바로 바로 장면이 바뀐다는 것이다. 권태가 있을 수 없다. 같은 장소라도 시간이 다르면 상황이 달라진다. 그러나 자꾸 보면 또 권태가 따른다. 毛埍이라는 이름 없는 역 그 곳도 문화의 창구이리다.
어김없이 점심시간이 되었고 불면 날아갈 것 같이 전혀 풀기가 없는 쌀밥이 입속에서 껄끄럽게 씹히지만 자고나서 밥 먹는 차속의 일과에 익숙해졌다. 차창의 화면이 자꾸 바뀌면서 쉽게 통하지 않는 말이지만 그냥 서로 눈길로 통하고 있다. 한국을 잘 알며 호의적이라는 중국인들의 감정이 무척 좋다. 우리네 강원도 보다 깊은 산골이지만 집들은 모두 붉은 벽돌로 3층 건물이 많다. 단층 건물은 많지 않다.
철도 옆으로 건너 산으로 터널 교각들이 이어지는 걸 보면 또 다른 철로, 아니면 고속도로 공사일 것이다. 옥수수 밭이 대부분이고 아래 계곡에는 벼가 자라고 있다. 비탈 밭을 가꾸는 모습이 우리네 화전 부락과 비슷하다. 벼 이삭이 이미 다 피었고 어떤 논은 누렇게 익어 고개 숙인 곳도 있고, 바람에 쓰러진 곳을 여러 포기를 모아 묶은 곳 등 우리네 모습과 다르지 않다.
이미 벼를 베어서 쌓아 놓은 곳도 간혹 눈에 띈다. 達州站 많은 사람이 내린다. 13:34분 重慶이 가까워지니까 벼를 벤 논이 많아지고 사료용으로 옥수수대를 수확하여 움막처럼 만들어 원통형으로 쌓아둔 곳이 많다.
중경역에 17시 10분쯤 도착하여 같은 방 아이 있는 가족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오늘 重慶을 떠나지 않으면 전화 연락을 해서 자기 집에 함께 묵으면 된다.’고 하며 명함을 건네준다. 朝天門에 있는 중경 동방 여행 유한 공사를 찾아 가서 1일에 장강 삼협을 둘러보는 쾌속선코스를 750元 주고 신청하였다. 여행사의 소개로 이웃에 있는 호텔로 빵차를 타고 갔다. 할인하여 120元에 하룻밤을 잘 수 있는데, 더블베드 2개가 놓인 큰 방이다. 에어컨은 있으나 냉장고는 없다.
짐을 대충 내려놓고 필요한 것 만 배낭에 챙겨서 다시 선박회사에 들러 임시정부 유지를 확인하여 여러 곳에 전화를 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 한국에 돌아 와서 확인해 보니 和平路 吳獅鎁港 / 馬浪路 普慶里로 나와 있다.
작년 2005. 10월에 개통했다는 經軌(單軌라고도 함)로 시내 관광에 들어갔다. 지하철이 없는 대신 다리발을 도로위로 높게 세워서 왕복 두개의 콘크리트 레일 받침을 만들고, 하나의 콘크리트 구조물 위를 수평으로 바퀴가 달린 하나의 열차가 달리도록 설계되어 있다.
일본기술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왕복이 되는 2차선구조이다. 重慶 長江 夜景을 차창으로 한눈에 볼 수 있다.
독일 부퍼탈의 슈바베 전차는 구조물에 매달려 달렸는데 중경의 經軌는 구조물 위에 얹혀서 가니 안전성이 더 높게 느껴진다. 3元주고 끊어서 楊家坪 역에서 반대편 차를 타고 종점인 較楊口로 돌아와서 다시 1구간을 끊으니 1元짜리 표를 준다.
解放碑 탑과 광장을 둘러보고 슈퍼에 가서 국수를 샀는데 2元에 두 그릇을 떨이 세일로 사고, 수박1/4쪽 우유 4병을 샀다. 택시는 밤 10시가 넘으니 많지 않고 기본요금 5元이 5.9元으로 할증이 된다.
숙소에 돌아와서 국제 전화를 하니 안 되어서 공중전화로 갔는데 가로등이 없고 악취가 심한 골목이 무척 음침하다. 휴대폰 배터리도 다 되고 사온 카드도 안 되니 막막하였다.
가까스로 몇 번 들락거린 후에 어느 상점 전화로 집에 전화하고 10元을 주었다. 카운터에 6시 깨워달라고 하고 샤워 후 양말 빨아 널고 잠들었다.
2006. 8. 13 토. 비온 뒤 맑음
6시 모닝콜. 서둘러 나가면서 보증금 80元 되받아 나왔다. 호텔을 나설 때 비가 약간 뿌린다. 걸어서 배사무실에 오니 6시 25분이다.
여행사 표시 VIP카드를 목에 걸고 안내원 한 사람의 도움으로 汽車 北站 버스터미널로 택시를 타고 왔다. 약8-9km 거리에 20元 쯤 된 것 같다. 쾌속선은 출발지가 萬州이다. 7시 19분 출발하는 일반버스에 다른 승객과 함께 탔다. 새벽에 못 먹고 들고 온 국수를 차안에서 먹었다. 중경 시내를 지나는데 華株 現代 라는 자동차 간판과 사무실이 보인다.
7시 26. 北部新區 톨게이트를 지나니 고속도로 왕복 6차선에 갓길이 있다.
‘淪宜高速’이라는 팻말이 보인다. 왕복 2차선의 긴 터널이 약 3분쯤 걸린다. 나와 보니 본래 편도2차선의 터널이 하나 더 있는데 앞에 막아놓은 것이 있다. 무슨 일이 있나 보다. 2분정도의 또 하나의 긴 터널, 9:58에 萬州站 이라고 쓴 톨게이트 지나 주유소 들렀다. 中國石化의 90# 高標準 淸潔汽油 (휘발유) 4,75 元 / 升(litter) 이고, 0# 柴油(경유 ) 4.74 元 / 升(litter)이다.
萬州 10:33 도착. 같은 버스정류장 주차장 뒤편에 長江飛船라고 쓴 셔틀버스가 대기하고 있다.
산 사이에 양자강(長江)이 흐르는 산기슭을 올라가면서 계단식으로 도시가 형성되어 있다. 벽돌로 쌓은 10여 층이 넘는 집들이 도로 옆으로 계속 이어진다. 重慶 - 萬州 노선버스 1대가 더 온 후 11:25 출발 11:35 선착장 도착, 승선장 산기슭으로 경사 급한 계단길이 여러 줄기 나있고 비탈을 따라 철로를 놓은 곳에 와이어로프로 산위까지 끌어 올려 작은 배를 청소한다.
쾌속선에 올라 長江을 내려가면서 삼국지에 나오는 張飛를 추모하는 張飛廟를 배경으로 한 장의 사진을 찍었다. 奉節 부두에서 道遊가 올라와서 나를 찾는다. 안내할 사람이 나 하나뿐이란다. 관광객에게서 돈은 따로 받지 않고 관광 회사로부터 하루에 40元을 받는다고 하며 宜昌 대학교 아르바이트 학생이라고 한다. 白帝城에 닿으니 또 다른 여학생이 나와서 白帝城을 안내한다. 역시 대학 1년생 아르바이트 학생이다. 왕복 17元주고 케이블 리프트를 타고 2-3분 쯤 올라가서 白帝城 곳곳을 들러 보았다. 무척 덥다.
萬州에서 늦게 출발하니 白帝城에 내려서 시간이 많이 촉박하다. 白帝城은 온통 유비, 제갈량 등 삼국지의 무대로 채워져 있고 유비가 어린 유선을 제갈량에게 당부하는 모습을 밀납 인형으로 만들어서 전시해 놓았다. 장강 삼협의 들머리가 되는 곳, 뒤로는 草堂河가 흘러들고 앞으로는 장강이 흘러드는 풍수상으로 명당이 되는 곳에 높고 작은 섬에 白帝城이 지어졌다.
워낙 시인 묵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아서 詩城이라고도 불린다. 아쉽게도 시간에 쫓겨 시를 적은 비석을 하나하나 못 보게 되었다. 맞은편 白鹽山의 흰 절벽과 맞은편 瞿塘峽을 이루는 붉은 赤甲山은 색조 배합에서 많은 대비가 된다.
棧道의 흔적을 보려고 했으나 볼 수 없었다. 巫山 小三峽을 뒤로한 채 巫峽으로 접어들어 12봉 중 눈에 띄는 6봉만 구경하고 설명을 들었다. 쾌속선의 곳곳에 러시아 글자로 된 오래된 명패들이 눈에 띄는 것은 아마도 러시아 해군에서 폐선된 것을 개조한 것인 듯하다. 디젤 엔진의 소음이 의외로 크고 시끄럽다. 갈 길이 바빠서 屈原廟는 그냥 지나갈 수밖에 없다. 香溪河 상류의 興山 부근에 前漢 元帝의 후궁으로 흉노의 선우씨에게 시집갔다는 王昭君 故里라고 되어 있다.
西陵峽에 와서 大平溪에 내려 생전처음 타보는 60명 정원의 대형승강기가 두 줄의 와이어에 매달려 가파른 비탈길 철로를 따라 올라간다. 한 사람 2元을 내야 한다. 또 한 사람의 댐 안내 가이드와 합류하여 작은 승용차로 산샤(三峽)댐을 둘러보았다. 대규모이다. 양쪽에 발전소를 만들고 가운데는 수량조절 겸 인공 폭포를 만든다고 한다.
3천 톤 이하의 배를 이동시켜주는 승강기와 3천 톤이 넘는 배가 댐을 지나 갈 수 있도록 5개의 계단식갑문도 시설되어 있다.
댐에서 이창까지는 39km로 약 45분 걸린다. 어둠속의 黃牛峽은 높은 봉우리들이 많이 늘어서서 보기 좋은 스카이라인을 이룬다. 宜昌역에 8시 도착 예정보다 빨리 닿았다. 宜昌역에서 열차시간표를 보는데 안내원이 밤늦은 열차가 있는데도 다른 차편을 물어 보면서 시간을 허비하여 매표소가 문을 닫게 되었다.
말이 서툴더라도 내가 직접 물어 보는 것인데 하룻밤을 철도 교통이 외진 宜昌에서 자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약삭빠른 가이드가 아는 호텔이 있다고 하여 소개를 받아 180元을 주고 잤다. 시설은 좋았으나 호텔이 아닌 모텔이고 가격표에 298元, 198元의 두 종류의 방이 있고 중경에서 120元을 주고 호텔에서 잔 것에 비하면 싸게 잔 것은 아니다.
새벽 5시 30분 모닝콜을 듣고 챙겨 나와 보증금 300元 받고 카운터에서 5元을 주고 宜昌시 지도를 샀다. 버스정류장을 물으니 맞은편이라고 하여 길을 건너는데 택시기사가 武漢까지 70元에 장거리 버스 태워 준다고 하여 타고 와보니 에어컨도 형편없는 완행버스였다.
직행85元이라는데 잘못 탔다는 생각이 든다. 6시 30분 버스 승차 후 주유소에서 기름 넣고 꾸물거리다가 고속도로 톨게이트 6시 50분통과 고속도로를 경유하여 11시 武昌 도착, 武昌역에서 14시 44분 출발 北京행 열차가 賣盡되어서 입석으로 끊었다.
‘武漢’이라는 명칭은 武昌의 북서쪽, 지류인 漢江이 합쳐지는 長江 맞은편에 漢口가 있고 漢口 남쪽 漢江 건너편에 漢陽이 있다. 長江과 漢江의 합수점을 중심으로 하는 武昌, 漢口, 漢陽 세 개의 도시를 합쳐서 ‘武漢’이라고 하는 大都市가 되었다. 漢口로 건너가는 武漢 長江大橋는 2층으로 되었는데 택시기사 말이 1956년 소련이 공산 혁명을 이룬 모택동을 위해 만들어준 것인데 2km가 되고 2층으로 되어 아래층은 기차가 다니고 위층은 자동차가 다닌다.
漢口로 가자고 하니까 50元을 달라고 한다. 메타기를 쓰라고 하니 22km거리인데 어느 쪽이나 값이 똑같이 나온다고 해서 그냥 가자고 했다. 40元으로 하고 한사람 더 태우자고 해서 그렇게 하라고 했으나 손님도 없고 교통경찰이 호각을 불어서 그냥 50元주고 漢口로 갔다.
利濟 北路에 내려서 京漢大路위에 건설된 輕軌道交通 電鐵 票를 샀다. 自動發賣機에서 10元(5元) 지폐(동전)를 넣으니 한국 500원 주화 크기의 남색으로 된 1.5元짜리 플라스틱 둥근 표가 나온다.
들어갈 때 개찰대 윗면에 대면되고 내릴 때는 개찰대 구멍에 넣으면 나갈 수 있다. 京漢大路 위에 높게 다리를 놓고 挾軌 두 가닥의 철로를 얹어서 그 위를 달리는데 重庚의 輕軌보다 좌우 흔들림이 적다.
역무원에게 물으니 3년 전에 만들어 졌다고 한다. 철도 주변의 낡은 아파트 철거가 한창이고 곳곳에 고층 건물들이 지어지고 있다.
객차에는 ‘軌道 交通’ ‘長春軌道 有限公司’라고 쓰여 있다. 모두 10개역만 오고 가는데 내릴 역을 지나서 코인을 넣었는데 열리지 않아 직원이 와서 5角을 더 내라고 하였다. 다시 표를 사서 차를 타니까 ‘내릴 역을 지났을 때는 표를 살 필요 없이 반대 방향 차를 타고 돌아가면 된다.’고 한다.
利濟 北路 武商路역에 내려서 택시를 타니 武昌역까지는 못 간다고 한다. ‘왜? 못 가느냐?’고 물으니 ‘알았다’고 하면서 타라고 한다. 가면서 하는 말이 오늘 8월 14일인데 長江大橋를 건너갈 수 있는 택시는 택시 번호 끝자리가 짝수인 차만 되고 자기 차는 끝번이 1번이라서 장강은 못 넘어 간다고 한다.
長江大橋 입구에 가니 짝수번호 택시 몇 대가 대기하고 있다. 일단 長江大橋 입구까지만 타고 왔는데 요금이 8元이다.
다시 짝수차를 타고 물으니 경찰이 곳곳에 있고 홀수 택시가 다리를 건너가면 200元 벌금을 내야 되며 타지에서 온 택시도 똑같다고 한다. 교통이 혼잡하여 택시 짝․홀수제가 시행된다고 한다. 武昌역에 내리니 17元이다. 두 번 택시를 탔는데 메타기로 25元 이니까 갈 때는 두 배의 바가지요금 50元을 낸 것이다.
법대로 메타기를 쓰면 서로 억울한 일이 없을 텐데 뭔가 이익이 되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감이 약은 기사에게 속은 것이다. 武昌역에서 열차에 올랐으나 입석이라서 그냥 복도에 서있으니 보통 불편한 것이 아니다.
열차승무원에게 부탁하였으나 좌석이 없다고 해놓고 계속 중국 사람들에게만 표를 끊어준다. 어렵게 6명이 쓰는 3층 침대 下段 票를 사게 되었다. 식당차에 가서 점심 겸 저녁으로 밥 한 그릇 국 한 그릇을 시켰는데 25元으로 비싸다.
수박 자른 것 5元, 별모양의 楊桃(광동 복숭아) 4개 한 봉지 15元을 주고 샀다. 한 개를, 물에 씻어 주는데 껍질 채로 먹으니 약간 시큼한 데 맛이 있다. 침대에 가서 계속 자고 광복절 이른 아침에 북경 서역 6시에 내려 어언 대학으로 돌아 왔다.